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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연예

‘씨름의 여왕’ 포스터라면서, 왜 세 남자 얼굴로 꽉 채웠나

등록 :2022-07-23 19:00수정 :2022-07-24 17:00

[한겨레S]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걸크러시 씨름 예능

기대 높았던 씨름·여성 예능 만남
본격 걸크러시 예능 내세웠으나
남성 출연진 앞세운 이상한 포스터
방송 의도 벗어난 인식 한계 아쉬워
<씨름의 여왕> 포스터. 티브이엔(tvN) 제공
<씨름의 여왕> 포스터. 티브이엔(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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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명의 여자 방송인들이 씨름에 도전한다니! 게다가 감독으로는 이만기와 이태현이 참여하고 코치로는 임태혁, 최정만, 허선행, 노범수가 참여한다니! 티브이엔(tvN) 스토리 채널과 이엔에이(ENA) 채널이 공동제작한 여성 씨름 서바이벌 예능 <씨름의 여왕> 소식을 들은 나는 전에 없이 흥분했다. 제작진이 나 좋으라고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한 건 아닐 텐데, 평상시 내가 좋아했던 씨름과 여성 예능이라는 두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걸 보니 좋아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씨름은 한차례 부흥의 기회가 있었다. 2019년 말 한국방송(KBS)은 씨름 서바이벌 예능 <씨름의 희열>(2019~2020)을 선보였는데,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며 화제를 일으킬 때쯤 불행히도 코로나19가 대유행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된 건 하필이면 대망의 결승전을 앞둔 시점이었다. 결승에 오른 임태혁 선수와 이승호 선수는 응원해줄 관중 하나 없는 텅 빈 스튜디오에서 쓸쓸하게 결승을 치러야 했다. <씨름의 희열>을 통해 씨름의 전성기를 꿈꿨던 선수와 팬들은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오랜 시간 고립되었고, 관중 없는 종목 특유의 쓸쓸함을 토로하던 이승호 선수는 결국 은퇴해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아쉬움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어쩌면 <씨름의 여왕>이 다시 한번 씨름의 붐을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lt;씨름의 여왕&gt; 한 장면. 티브이엔(tvN) 제공
<씨름의 여왕> 한 장면. 티브이엔(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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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한 완성도의 본편

다른 한편으로는 에스비에스(SBS) <골 때리는 그녀들>(2021~)이 써내려 가고 있는 성공 공식이 다른 프로그램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지 또한 관심사였다. <골 때리는 그녀들>이 성공하자, 다른 방송사들도 앞다투어 여성 스포츠 예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문화방송(MBC)은 파일럿으로 여성 컬링 예능 <컬링퀸즈>(2022)를 선보였고, 제이티비시(JTBC)는 여성 농구 예능 <마녀체력 농구부>(2022)를 선보였다. 그러나 <컬링퀸즈>는 정규편성 소식이 없고, <마녀체력 농구부>는 팬들을 사로잡지 못한 채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이대로라면 <골 때리는 그녀들>이 거둔 성공은 오직 그 프로그램에만 국한된 예외적인 단발성 성공에 그친다. 그러니 <씨름의 여왕>의 성공 여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여성 스포츠 예능’이 하나의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씨름의 부흥’과 ‘여성 스포츠 예능 장르의 확립’이라는 두가지 기대치를 가지고 본 <씨름의 여왕> 첫화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난 19일 방송된 1화에서 레벨테스트에 임한 스무명의 도전자들은, 아직 이렇다 할 기술도 없지만 그럼에도 예상외의 모습을 보여줬다. 최약체로 손꼽히던 김경란은 큰 체구의 자이언트 핑크를 상대하며 제 중심을 지켜내 끝내 승리를 거뒀고, 특전사 출신의 방송인 박은하는 코미디언 연예림을 상대로 기술을 걸려다가 제 무릎이 먼저 모래판에 닿는 바람에 어이없이 패배했다. 힘이 세다고 해서 꼭 이기는 것도, 기술이 달린다고 해서 꼭 지는 것도 아닌 씨름의 변화무쌍한 매력을 뽐내기엔 충분한 에피소드였다.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1화 시청을 마쳤다.

그러나 본편이 사뭇 준수한 완성도를 보여준 것과 달리, 방영 전 공개된 프로그램 포스터는 여러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지 주객이 심하게 전도된 포스터였기 때문이다. 스무명의 방송인들이 토너먼트를 거쳐 단 한명의 우승자를 뽑는 프로그램이라면, 포스터에는 누가 들어가 있어야 할까?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더라도, 포커스는 도전자들에게 맞춰지는 게 맞다. 하지만 “승부를 위해 모든 것을 건 강한 여자들의 한 판!” “본격 걸크러시 격투 예능”이라는 홍보 문구가 무색하게, 이 포스터에 가장 크게 얼굴이 들어간 건 진행자 전현무와 감독 이만기, 이태현이다. 본격 걸크러시 예능이라면서 세 남자의 상반신 사진으로만 포스터의 2분의 1을 채웠으니, 포스터를 본 사람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냥 진행자인 전현무 사진이 도전자로 참가한 김새롬 사진의 7배 크기일 이유는 대체 뭐지? 왜 도전자들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려면 포스터를 2배 넘게 확대해서 봐야 하는 거지?

&lt;씨름의 여왕&gt; 포스터. 티브이엔(tvN) 제공
<씨름의 여왕> 포스터. 티브이엔(tvN) 제공

물론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이와 같은 포스터가 없던 건 아니다. 엠넷(Mnet) <슈퍼스타케이(K)> 시리즈(2009~2016)나 제이티비시 <싱어게인> 시리즈(2020~)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종종 심사위원들의 사진을 포스터 전면에 내세우곤 한다. 그러나 100만명이 넘는 무명의 오디션 참가자들 중 한명을 뽑게 되는 <슈퍼스타케이> 시리즈, 누가 출연하는지 그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싱어게인> 시리즈와, 대중에게 이미 제 이름과 얼굴을 알린 방송인 스무명이 도전하는 <씨름의 여왕>은 그 사정이 다르다. 그렇다면 역시 엠넷 <굿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2020)라거나 <언프리티 랩스타> 시리즈(2015~2016)가 그랬던 것처럼, 포스터에도 도전자들의 얼굴이 크게 박히는 게 맞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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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아닌 남성 지도자에게 방점, 왜?

설마 하니 여성 스포츠 예능을 만들겠다고 나선 이들이 의도적으로 여성 도전자들의 존재감을 지우려 했던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얘기를 뒤집어 생각하면, 명색이 여성 스포츠 예능을 만들겠다고 나선 이들조차 이 포스터가 뭐가 문제인지 포스터 공개 시점까지도 인식을 못 했다는 서글픈 결론이 나온다. 여성들의 도전에도 결국 권위를 얻고 더 큰 존재감을 과시하는 건 남성 지도자이며, 심지어 진행자마저 남성 지도자들 사이에 끼어 함께 권위를 과시하는 아이러니란. 나는 지금이라도 <씨름의 여왕> 제작진이 얼른 포스터를 바꿔주기를 바란다. 아무리 프로그램의 의도가 좋고 완성도가 준수해도, 포스터에서부터 제작진이 지닌 인식의 한계가 이토록 선명하다면 대체 누가 흔쾌한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보겠는가? 포스터부터 여성 도전자들보다 남성 지도자들에게 주목한다면, 어떤 시청자가 도전자들에게 관심을 주겠는가?

이승한 _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