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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종교

“원불교 가르침 개방적, 서양문명과 잘 통할 것”

등록 :2006-09-26 18:24수정 :2006-09-26 18:28

교전 영어 번역 이끈
백낙청 서울대 명예 교수/

한국 자생 종교의 대표격인 원불교의 교전이 10년의 작업 끝에 영어로 번역됐다. 인쇄만 남겨둔 (원불교 교전)이다. 미국 뉴욕 인근의 50만평 부지에 미주총부를 건립중인 원불교로선 원기(탄생) 91년 만에 좀 더 큰 바다로 나아갈 소프트웨어까지 마련한 셈이다.

이 교전 영역엔 만만치않은 인사들이 참여했다. 세계적인 불교학자인 로버트 버스웰(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와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과학과 원불교 교리에 동시에 탁월한 식견을 갖춘 최영돈(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미주선학대교수인 박성기 교무와 버스웰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리 버스웰도 함께 했다. 백 교수는 1970년대 초 송광사 방장이던 구산 스님에게 출가했던 승려 출신 버스웰 교수를 이 작업에 참여시켜 영역본의 산파 구실을 했다. 버스웰 교수가 1971년과 1988년에 간행된 바 있던 교전 영역본을 기초로 초역을 하면 이를 기초로 정역위원들이 서울과 로스앤젤레스 등에 모여 2박3일 가량 합숙을 하며 정리했다.

<창작과 비평> 대표, 영문학 교수, <시민방송> 이사장 등으로 촌음도 쪼개서 살아가며 10년 간 이 작업을 해온 백 교수(68)를 25일 만났다.

지금까지 백 교수가 불교에 조예가 깊은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와 원불교의 관계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해 “원불교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1970년대부터 원불교 교전을 읽은 흔적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부인 덕에 교전 접하고 깊은 감명… 10년간 촌음 쪼개 공동작업
번역은 포교 차원보다 한국사상 세계 알리기 의미


그와 원불교 사이의 인연의 끈은 부인 현지성(광운대) 교수였다. 해방 전 개성교당에 나가던 어머니 때부터 원불교 교도였던 현 교수는 원불교 여성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결혼 초부터 부인의 머리맡에 놓인 교전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원불교에 입교는 하지 않았고, 교전 작업을 마친 현재도 여전히 원불교에선 ‘재야’로 남아 있다. 그러니 백 교수에게 교전 영역은 원불교 포교의 일환이라기 보다 한국 문학과 사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의미가 있었다. 1996년 영역에 자문하는 정도의 일로 알고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결국 “영어를 배워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행복이었다”고 고백할 만큼 백 교수는 불교의 그 방대한 가르침을 70쪽 분량으로 간명하게 요약·정리한 <정전>의 탁월성과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언행록인 <대종경>의 민족 문학적 매력에 푹 빠졌다.

“교전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로부터 시작하지요. ‘정신 개벽’은 불교에서도 익히 강조했던 것이지만, ‘물질 개벽’이란 시대적 진단과 함께 정신 개벽을 주창한 것이 차이가 있지요. 특히 원불교의 가르침은 유·불·선을 통합하면서도 불법을 주체로 삼아 과학문명과 기독교 문명에도 개방적이어서 서양문명과 잘 회통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는 원불교의 큰 장점으로 ‘합리성’을 꼽는다. 불교에선 ‘알음알이’(지식)보다 깨달음만을 강조하는 전통을 이어왔지만 원불교는 불교적 깨달음을 강조하면서도 알음알이를 제대로 갖추는 것도 간과하지 않기에 서구사회는 물론 현대인들과도 잘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해방 뒤 북에서 핍박받고 내려오거나 부모가 학살이나 숙청을 당한 상처를 입은 종교인들이 남한에서 대부분 냉전의 선봉장으로 살아가는데, 왜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지를 물었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큰아버지인 백병원 이사장 백인제 박사와 동시에 6·25때 납북된 이후 생사를 모르는데도, 평생 분단체제 극복과 화해를 주창해온 이유를 물은 것이다.

“나는 효심이 별로 없는 모양”라며 껄껄껄 웃던 백 교수는 “아버지의 아픔도 특수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겪은 수많은 아픔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냐”고 말했다.

남과 북, 동양과 서양, 도(道)와 학문을 회통시키는 그의 미소가 가을 햇살과 가을 바람이 만난 것처럼 익어간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