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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자’의 색다른 감수성으로
그림과 음악에 대한 생각 확장
국가주의, 민족주의, 모국어 등
기성 관념에 대한 새로운 사유 물꼬
사회적 의제 관심과 미학적 품격이
성공적으로 만난 에세이스트
비속한 시절, 선생의 부재 아쉬워
재일동포 작가 서경식 선생이 지난 18일 오후 별세했다. 선생은 지난 5월 인천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강연했고, 9월에도 서울에서 2주일 머물렀다. 허리·다리 통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조심스레 걸어야 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으나 호전되고 있다고 했고, 여럿이 함께 식사하며 얘기를 나누기에도 별 지장이 없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몇 년 왕래가 끊긴 뒤의 재회를 몹시 반겼는데, 뜻밖의 별세 소식에 한국과 일본 독자들과 지인들은 황망함 속에 서로 연락을 취하며 애도했다.
1990년대 초 책을 통해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선생은 “일본보다 두세 배 정도”나 된다며 기꺼워했던 한국 독자들 대상의 활발한 저술과 강연 등을 통해 ‘디아스포라’와 ‘소수자(마이너리티)’, 경계인 등 한국사회에 생소했던 말들을 폭넓은 대중적 반응과 공감 속에 정착시켰다. 그리고 ‘외부자’의 색다른 감수성으로 그림(미술)과 음악에 대한 생각과 ‘타자에 대한 공감’,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차원 높게 벼리고 확장했으며,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일본, 재일동포, 책, 가족, 모어와 모국어 등에 대한 기성관념들에 충격을 가하고 새로운 사유의 물꼬를 터 한국 독서계와 지식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뒤돌아보면 내가 머물렀던 시대의 한국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문민정권 시대, 긴 군정을 극복하고 아직 문제투성이라고 하면서도 희망과 활력을 느끼게 해 주었던 시대였다.” 지난 7월 18년을 이어 온 ‘한겨레’ 연재 마지막 칼럼에서 선생은 “내가 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고 받아들여진 것도 그런 시대의 공기 덕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에 큰 희망을 걸었던 선생은 그 공기가 또 다시 바뀌고 있는 낌새를 일찍부터 포착하고 불길해 했다. 최근엔 “윤석열 정권 아래서 한국 사회가 역회전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며 “모든 것이 천박해지고 비속해지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승산이 거의 없었음에도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의 실현을 위한 실천적 발언을 계속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떠올리며 “우리도 승산이 있든 없든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선생이 일찍부터 되새겨 온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시인 파울 첼란의 투병통신(投甁通信)에 빗댄 말을 떠올리게 한다. “(글쓰기란) 외딴섬에 표류하는 사람이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흘려보내는 것과 같은, 또는 어둠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다. 누군가에게 가닿을지, 반향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채 알지 못하는 독자를 향해 말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선생은 그 미지의 벗들을 향해 가닿을 기약도 없는 편지와 돌을 마지막 순간까지 던졌다.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92년 한국어 번역본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첫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를 통해서다. 2005년 발령받아 온 한겨레 문화부에서의 첫 임무가 다양한 책 이야기를 담는 타블로이드판 섹션을 만드는 일이었다. 칼럼도 몇 개 싣기로 했는데, 일본쪽 필자로 바로 그 ‘나의 서양미술 순례’ 저자가 만장일치로 낙점됐다. 기이하게도 지난 10월 한겨레에 실린 선생의 마지막 글(‘나의 첫 책’)도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관한 이야기였다.
“벨기에의 고도 브뤼허의 미술관에서 ‘캄비세스 왕의 재판’을 마주했을 때, ‘아, 역시…’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그림이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고 있는 희생자의 모습에서, 몇 개월 전 깊은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을 겹쳐서 봤던 것이다. 그 3년 전에는 모진 병고 끝에 어머니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1983년. ‘조국’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았을 집안의 기대 속에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서승)과 법학과(서준식)에 다니던 두 형은 이미 10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었다.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격전을 벌인 1971년 봄, 방학을 일본 집에서 보내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보안사로 연행돼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조작 사건의 희생자가 됐다. 고난은 이듬해 유신헌법 공포로 박정희 영구집권체제가 가동돼 대통령을 관제 간접선거로 뽑는 군사독재체제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와세다대에 진학했던 선생의 삶은 형들을 구명하기 위한 활동과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60여 차례나 현해탄을 오가다 그들의 석방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삶을 마감한 어머니와 가족들 건사로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가 쓴 글(‘서경식 다시 읽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름다운 에세이는 대체로 사회적 의제에 무관심하고, 반대로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예리한 에세이는 미학적으로 거친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서경식의 에세이에서는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품격이 성공적으로 만난다. 첨예한 정치적 어젠다를 다루면서도 깊은 페이소스와 슬픔, 매혹적인 문체로 채워진 서경식의 글은 독자에게 각별한 매력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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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 상을 받은 ‘소년의 눈물’ 등 30여 권의 저서 다수가 미학적 품격이 도드라지지만, ‘시대를 건너는 법’ 등에서도 거듭 변주되는 그의 유소년기 고민과 상처, 열등감과 자부심, 부러움과 두려움, 불안, 외로움의 교차는 읽는 내내 자욱한 슬픔을 안겨 준다. 그런데 묘하게도 슬픔이 힘이 된다. 그 슬픔의 원천은 끊임없이 차별받고 억압받는 일본 내 ‘2등 국민’ 재일동포의 현실에 대한 투철하고 정직한 자기인식이다.
선생의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품격의 성공적 결합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식민지배 구조와 뒤틀린 정치현실의 심연에 대한 정직하고 용감한 응시와 깊은 사유, 절제되고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표현, 승산이 있든 없든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투병통신’적 용기와 의지 위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식민주의 심성에 맞서 때로 치열한 논전을 불사하는 전투적 ‘논객’으로서의 선생의 면모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선생의 이런 면모를 두고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는 투사다. 하지만 총칼이 아니라 글을 무기로 삼아 싸우는 고독한 반식민주의 투사다.”
역회전하면서 모든 것이 천박해지고 비속해지고 있는 시절에 더욱 절실해진 선생의 부재가 아프고 슬프다.
한승동 시민언론 민들레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