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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은전 칼럼] 어떤 생애의 탄생

등록 2023-03-05 18:23수정 2023-03-06 02:39

이규식이 자서전을 썼다. 작년에 규식의 동료들이 그의 자서전을 함께 쓰기 위해 팀을 꾸렸다. 그들은 규식과 끝없이 이야기하면서 마침내 규식의 생애를 완성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한번도 등장한 적 없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의 생애사이면서 동시에 ‘이야기할 권리’의 탄생을 알리는 아름다운 이야기책이다.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지난해 4월20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다른 세상을 만드는 4·30 봄바람 계획 발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지난해 4월20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다른 세상을 만드는 4·30 봄바람 계획 발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홍은전 |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이규식이 자서전을 썼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인 규식은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대표이자 가장 전투적으로 싸우는 활동가다. 규식은 언어장애가 있고 손을 거의 움직일 수 없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가며 글을 쓸 수 없다. 무엇보다 그는 30년 동안 집과 시설에 갇혀 교육은커녕 가족 외의 사람을 만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경험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그가 54살의 나이에 자서전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3월 출간 예정)를 썼다.

오래전 우연히 노들장애인야학 교사가 되었을 때, 이 세계는 이상하고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마치 중력이 다른 행성 같았던 그 세계에선 매월 꼬박꼬박 소식지를 냈다. 내가 처음 이 낯선 행성에 도착했던 2001년 8월의 소식지 표지모델이 바로 규식이었다. 야학 인권 수업에서 ‘장애인 자립생활 운동’이란 걸 알게 되고, 선진국의 장애인들은 비장애인처럼 학교도 다니고 외출도 한다는 사실에 천지개벽하는 충격을 받은 규식이 ‘나도 자립생활을 할 수 있다!’ 선언하며 야산의 버려진 판잣집을 개조해 혼자 살기에 도전한다는 소식이었다. 야학 교사들은 “규식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면서 그를 치켜세웠지만 그의 대단함을 알아볼 지식도 경험도 없었던 나로선 그저 ‘저 사람은 가족과 관계가 나쁜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22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소식지를 펼쳐 2023년의 내가 2001년의 규식을 물끄러미 본다. 폐건축자재들이 혼란스럽게 쌓여 있는 폐허 속에 판잣집이 한 채 있고, 그 앞에 스쿠터를 탄 규식이 있다. 자립생활의 꿈에 부푼 규식은 이렇게 썼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하고, 혼자서 할 수 없는 건 지원받을 수 있도록 내 권리를 주장하겠다.” 2023년의 나는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는다. ‘대체 어떻게 이토록 무모할 수 있지?’ 사진 속 세계엔 규식을 보호해줄 아무런 법과 제도가 없다. 그는 지하철 리프트를 타다 추락해 죽을 뻔했고, 늦은 밤 똥이 급할 때마다 지하철 역무원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해야 했다. 역무원들은 마지못해 도와주면서도 왜 여기 와서 똥을 누느냐고 화를 냈다. 온갖 위험과 모욕에도 규식은 집과 시설에만 머물도록 강요되는 삶을 거부하고 자립생활을 감행했다. 생을 건 도전이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콜럼버스보다 더 용감한 탐험가들과 이번 생을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규식은 15년 전부터 자기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용기를 내 부탁했다. “자서전을 쓰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어?” 규식이 말을 뱉기 위해선 온몸의 힘을 짜내야 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온전히 듣기 위해선 긴 시간과 각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떤 사람은 한번, 어떤 사람은 스무번 넘게 만나 그의 이야기를 기록해주었다. 규식의 제안이 부담스러워서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도 늘어났지만 규식은 요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규식의 생애는 조금씩 채워지고 선명해졌다.

작년에 나는 장애인운동 활동가 여섯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생애를 기록했는데, 규식도 그중 한명이었다. 나의 중요한 임무는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북돋우는 것인데 규식에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대신 나는 규식을 좀 놀려먹고 싶어서 이렇게 물었다. “자기 인생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높은 자신감은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뜻밖에 규식의 대답은 ‘자기 인생이 얼마나 특별했는지’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언어장애가 있다는 건 단지 남들보다 느리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규식이 입을 열면 노인들은 혀를 끌끌 찼고 식당 주인들은 밥을 주지 않고 쫓아냈다. 20여년 동안 온갖 투쟁을 이끌어온 대표적 활동가였음에도 그에게 마이크를 잡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규식은 생애 내내 이야기를 억압당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권리인지 뼈저리게 알았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이고 우정을 나누는 일이며 그들로부터 날마다 배우고 성장하는 일이라고, 규식이 말했다. 작년에 규식의 동료들이 그의 자서전을 함께 쓰기 위해 팀을 꾸렸다. 그들은 규식과 끝없이 이야기하면서 마침내 규식의 생애를 완성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한번도 등장한 적 없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의 생애사이면서 동시에 ‘이야기할 권리’의 탄생을 알리는 아름다운 이야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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