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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김원철│사회부장

 박동운씨는 ‘진도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입니다. 농협에 다니던 그는 아내가 셋째를 임신 중이던 1981년 3월5일 전남 진도까지 찾아온 안기부 요원에 의해 서울 ‘남산’으로 끌려갔습니다. 60일간 고문 끝에 ‘간첩’이 됐고, 17년5개월 옥살이한 뒤인 1998년 8월15일에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나이 53살 때였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가 이런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며 만든 독립조사기구입니다. 많은 ‘박동운’이 이곳을 찾습니다. 2020년 활동을 재개한 2기는 2010년 활동을 종료한 1기보다 힘이 셉니다. 자료 제출 요구권이 명료해졌고, 청문회를 열어 증인을 부를 수 있습니다. 조사 방해 때는 형사처벌도 가능합니다. 국회가 법을 개정해 2기에 힘을 더 실어준 건 위원회 결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국가기관(진실화해위)으로부터 ‘피해자’로 공인받아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국가의 공식 사과(손해배상)를 받으려면 지난한 소송전을 치러야 합니다. ①법원에 재심을 신청하고 ②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고 ③재심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고 ④무죄판결을 근거로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⑤1·2·3심을 거쳐 손해배상을 확정받아야 합니다.

1998년 석방된 박동운씨는 2007년 4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 2009년 1월 진실화해위가 잇따라 ‘고문 조작’이라는 점을 확인해줬지만, 2009년 6월에야 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립니다. 그해 11월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됩니다.

2011년 5월 박씨는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합니다. 2012년 7월 1심에서 이깁니다. 배상금 절반을 받습니다. 2013년 7월 2심에서도 이깁니다. 그러나 2014년 12월 대법원은 ‘너무 늦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는 논리로 패소 판결을 내립니다. 이후 국가는 1심 패소 뒤 지급했던 돈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냈고, 헌법재판소·서울고법·대법원을 거치는 소송전 끝에 2020년 2월, 붙잡혀 간 지 39년 만에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는 것이 확정됩니다. 그의 15번째 재판이었습니다.

많은 국가폭력피해자가 진실화해위를 거친 뒤에도 박씨와 엇비슷하게 ①~⑤번 단계를 밟습니다. 단계마다 국가는 판사로, 검사로, 또는 변호사나 공익법무관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진실화해위의) 피해사실 조사가 부족하다’거나 ‘손해배상을 늦게 청구했다’ 등의 말로 어깃장을 놓습니다.

한동훈 장관의 법무부가 과거사와 관련해 몇 가지 인상적인 조처를 내놓은 건 사실입니다. 법원의 화해권고안을 받아들여 인혁당 피해자들에 대한 ‘빚고문 소송’을 중단했고, 제주 4·3의 일반재판 수형인들에 대해서도 직권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최근에는 이른바 ‘녹화공작’ 피해자인 박만규 목사와 고 이종명 목사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항소를 우여곡절 끝에 포기했습니다. 어떤 뒷배경이 있든 정부의 항소 포기는 피해자들에겐 좋은 일입니다. 잘했습니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합니다. 즉흥적이고, 선택적입니다. 당장 박 목사, 고 이 목사와 같은 ‘녹화사업’ 피해자 130명이 전국 각지의 법원에서 소송 중입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피해자분들께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항소를 포기했던 법무부는 전국 각지의 법원에서 ‘손해배상을 할 수 없다’며 또다른 자아로 피해자들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법무부 차원에서 합리적이고 일관된 기준으로 ‘항소 포기’, ‘직권 재심 청구’를 한다 해도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합니다. 항소 포기는 ⑤번 손해배상 소송을, 직권 재심 청구는 ①번 재심 신청을 조금 수월하게 해줄 뿐입니다. 여전히 지난한 단계들이 피해자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배·보상법 입법에 관한 정책 권고’를 의결했습니다. 위원회가 인정한 피해자에게 국가가 ‘원스톱’으로 배·보상을 해주자는 것입니다. 국회엔 관련 법이 여럿 발의되어 있습니다.

“국가는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는 겁니까?” 서울고법은 2019년 4월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에 따라 ‘국가는 다시 박씨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법무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상고하자 박동운씨가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잘못이 드러나면 사과하고 책임진다’는 상식을 국가에 요구합니다.

won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