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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여군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록 2021-06-14 14:41수정 2021-06-15 11:25

여군 성폭력 뉴스레터
여군 성폭력 뉴스레터

[숨&결] 방혜린 |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예비역 대위

여군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마다 반복되는 상황에 맥이 빠진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매번 이번에는 근절한다며 계책들을 내놓지만 여태껏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정착되어 굴러가는 것을 본 적이 드문 것 같다. 어떤 노력과 대책을 쏟아부어도 마치 무한으로 발산하는 함수처럼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은 줄어들 기미 없이 매년 그 수치를 갱신 중이다.

2013년, 2017년, 2021년. 성폭력 피해자가 사망하는 비극이 4년 주기로 반복되는 것은 과연 제도와 시스템이 부재해서였기 때문일까? 가해자를 엄단하고,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은 지휘관과 관계자들을 처벌하면 비극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군부대 울타리 밖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얘기하지만 정작 당사자이자 내부의 구성원인 여군들의 생각은 다르다. 다음 비극의 당사자가 다름 아닌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지금 이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여군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정서다.

엄밀히 말해 최근 군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포함해 이런 일이 반복되어 발생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군대 내의 여성혐오 문제가 차마 수습할 수도 없는 수준인 바닥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늘 언급되는 상석에 여군 앉히기, 주요 행사에 ‘치마를 입힌’ 여군 배석시키기, 회식 자리 등에 꾸미고 오게 하기 등 여군 창설 이래 수십년간 반복된 문화를 굳이 다시 상기시킬 필요도 없다. 여군 문제나 여성징병제 뉴스에 달린 댓글부터가 이미 이 사회가, 우리 군이, 조직의 대다수인 남성 구성원이 여군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군을 ‘국방조무사’라고 칭하며 비하하며 조롱하는 글이 인터넷 인기글로 팔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작 당사자 그룹인 여군들은 작금의 상황이 여론의 주목을 받는 것도 회의적인 시각에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처벌받고, 해임되어 교체되고, (이미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또 매뉴얼을 새로이 업데이트하고, 형식적인 교육의 빈도수를 높이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미 국회부터가 도대체 보고를 누가 제대로 못 받은 것인지, 국선변호인이 피해자를 제대로 지원한 것인지 처벌의 선을 긋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우리 군과 사회를 둘러싼 공고한 남성연대, 여성혐오와 차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너는 여자가 아니고 군인이야, 여자같이 굴지 마”라는 말을 여군 출신이라면 어디서나 들어봤을 것이다. 사실 둘은 함께 붙일 수 없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여성이라는 것은 성정체성의 영역이고, 군인이라는 것은 직업의 영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여자이면서도 동시에 군인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군은 의도적으로 여성에게 여성성을 지우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녀(女)들이 남성사회에 ‘진짜사나이’로서 저항 없이 포섭되길 바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성사회에서 남성이 수행하지 못하는 어떤 역할, 예를 들어 남자를 돋보이게 하거나 혹은 치장할 수 있는, 또는 함부로 괴롭히거나 망가뜨려도 되는 객체화된 ‘여성’ 그 자체로의 역할도 수행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이런 인식은 여군을 국방조무사라고 부르는 것에서, 아무 상관 없는 여군을 사적인 술자리에 당직까지 바꿔가며 부르거나 상급자가 소개해준 다른 고위 간부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하고 이를 거절하면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여전히 군대 곳곳에 남아 있다.

군대 내 성폭력 문제를 단죄할 수 있는 확실하면서도 가장 절실한 부분은 바로 군대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다. 이미 여군들이 지키고자 했던 나라는 여군들 스스로에게서부터 조금씩 없어지고 있다. 누군가를 처벌하고, 형식적인 재발방지 대책을 약속하는 것으로만 갈무리된다면 여군들의 나라는 영영 없어진다는 것을 국방부는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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