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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빈(13)은 여섯살부터 혼자였다. 엄마와 떨어져 전남 나주시 문평면에 있는 외조부모 댁으로 온 순간부터 동네에서 아이라곤 효빈이 혼자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갔더니 한 학년에 효빈이뿐이었다. 졸업할 때가 돼서야 먼 동네에 사는 단짝 친구 한명이 생겼다. 지난달 31일 오후 5시40분 학교 수업을 마친 효빈이가 “안녕”이라고 외치며 집으로 들어왔다. 중학교와 거리가 멀어 학교에서 지원하는 통학 택시를 이용하는 탓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 시간은 없다. 집에 와 아픈 외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익숙한 동네를 산책했다. 외할머니 이영남(60)씨는 벌써 어른스러운 효빈이가 안쓰럽다. “어려서부터 밝았어요. 근데 해가 지려고 하면 엄마 생각이 나나 봐요. 내색은 안 해도 구석에 가 있고 엄마가 전화 안 받는다고 울었어요. 지금도 한 번씩 울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효빈이를 낳은 엄마는 원체 몸이 좋지 않아 식당 일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아빠는 가계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결국 둘이 떨어져 지내면서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외할머니는 효빈이가 점점 야위어가는 모습을 보고 데려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애기가 한창 크니까 잘 먹고 해야 하는데 빼빼 말라서 아토피는 심해서 난리고 말도 못 했어요. 긁으면 피가 찍찍 나고 엄청 심해서…. ‘이건 안 되겠다, 내가 데려와야겠다’ 해서 데려왔어요.” 광주의 친구 집에 얹혀사는 엄마는 돈을 모아 거처만 마련되면 효빈이를 데려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5년 전 자궁암이 생겨 아직도 완치가 안 됐다. 돈을 벌어보려고는 하지만 힘에 부쳐 자신의 생활비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가끔이나마 연락을 하던 아빠는 지난해 예상치 못한 사고로 숨졌다. 세 가족이 함께하는 꿈은 더욱 멀어져 갔다. [%%IMAGE2%%] 효빈이의 버팀목이 돼준 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효빈이를 갑작스럽게 데려오면서도 힘든 걸 느끼진 못했다고 했다. 늘 밝게 웃던 효빈이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집 안 곳곳에는 효빈이의 유치원 졸업사진, 초등학교 음악 시간이나 체육 시간에 선생님이 찍어준 사진이 여러장 걸려 있었다. ‘난 자랑스러운 손녀딸 효빈이야. 약 7년 동안 저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말로는 표현 못 하지만 할머니 많이 사랑하는 거 알죠?’라는 편지도 서랍장 잘 보이는 곳에 붙어 있었다. ■ 폐암 외할아버지 병원비 특례도 끝 불행은 갑자기 찾아왔다. 2018년 8월4일 밭에서 고추를 따던 외할아버지가 숨이 찬다고 했다. 큰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암 말기, 의사는 한달에서 석달 버틸 수 있다는 소견을 내렸다. 외할아버지는 농사일을 했는데 돈을 더 벌기 위해 종종 석산에 가서 돌을 캤다. 외할머니는 그때 들이마신 먼지가 폐암의 원인이 됐다고 생각했다. 소득 대부분을 벌어왔던 외할아버지가 쓰러지자 집안이 휘청였다. 당시 외할머니가 초등학교에서 청소 일을 하며 벌었던 돈은 한달에 90만원 남짓이었고, 공무직으로 전환된 지금도 140만원 정도를 번다. 외할아버지가 처음 아팠을 땐 병원비로 한달에 100만원이나 나왔다. 생활비가 부족해 빚을 끌어다 썼다. 중증질환 산정 특례로 5년간은 5%의 본인 부담금만 내며 버텨왔지만, 지난 7월부터는 이마저도 끊겼다. 6년째 병과 사투 중인 외할아버지는 호흡이 가빠질 때마다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지원이 끊긴 뒤 54일 만에 퇴원하고 받아든 청구서엔 186만원이 찍혔다. 외할머니 이씨는 “의사가 다음에 올 땐 병원비가 더 나오겠다고 얘기했다. 많이 참으면 한달, 짧게는 3~4일 만에도 숨이 가빠져 병원에 가서 입원해야 하는데 벌써 걱정된다”며 “이제 내가 아니면 우리 집은 무너진다”고 한숨을 쉬었다. 외할머니도 5년 뒤면 정년이다. [%%IMAGE3%%] 더군다나 흙으로 지은 집도 무너져가고 있었다. 지난 폭우 때 효빈이가 지내는 방의 벽 한쪽이 무너질 뻔했다. 흙벽을 지탱해주던 외벽이 떨어졌고 나무 기둥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지붕 아래로 어지러이 엉킨 전선도 문제다. 비가 많이 왔을 때 합선이 돼 연기가 피어오른 적도 있었다. 효빈이 방은 단열이 안 돼 어렸을 때부터 겨우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런데도 효빈이는 “더운 것보단 추운 게 낫다는 마인드라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탓에 외할머니는 효빈이에게 항상 미안하다. 외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다 보니 평소 식비를 아껴 퇴원하면 ‘특식’을 차리곤 하는데 효빈이가 그날만 기다릴 정도라는 것이다. “자기랑 할머니는 김치에다만 밥을 먹으면서 왜 할아버지만 오면 고기를 해주냐고 하기도 해요. 그래도 할아버지 오면 고기 먹는다고 좋아하니까 그때 마음이 안 좋아요.” ■ 꿈 많은 효빈…외할머니는 착잡 효빈이의 꿈을 마음껏 응원해줄 수도 없다. 효빈이의 장기는 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보던 아이돌 영상으로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에 다닐 땐 영상에서 배웠던 춤을 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한 동생의 ‘존경하는 인물’로 효빈이가 꼽힐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효빈이는 “조금 관뒀다”며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디션을 알아보기도 했는데 자신이 없고요. 1차라도 붙으면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해요.” 다른 꿈을 꿔보기도 했다. “꿈이 맨날 바뀌어요. 커피를 좋아해서 바리스타가 되고 싶기도 하고 파티시에(제빵사)가 되고 싶기도 해요.” 꿈 많은 효빈이를 보는 외할머니의 마음은 착잡하다. “효빈이는 춤도 잘 추는데 우리가 뭐가 있어야, 가르칠 능력이 돼야 해주죠.” [%%IMAGE4%%] 효빈이는 또래 아이들이 한다는 건 다 해보고 싶어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교복 자율화인 중학교에 입학해 사복을 입고 다니지만, 옷가지 수가 적어 늘 옷이 필요하다. 학교 선생님이 알아봐 준 덕분에 지난해에야 교육청을 통해 중고 노트북을 겨우 지원받을 수 있었다. 교과목이든 춤이든, 학원은 꿈도 꾸지 못한다. 외조부모와 한 번도 여행을 가지 않았던 효빈이는 ‘에버랜드’에도 꼭 가보고 싶다. ‘킁킁.’ 효빈이는 때 묻은 하얀 보자기를 들고 오더니 코를 댔다. 여섯살 때 들고 온 ‘아기 담요’인데 아직도 안고 잔다고 했다. “냄새가 좋아요. 순수한 냄새가 나요. 작게 구멍이 났는데 꿰매면 얘만의 느낌이 사라질 것 같아 두고 있어요. 빨아도 세제 향이 안 스며들어서 신기해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으냐’는 말에 웃음 지으며 말을 피하던 효빈이는 “그래도 매일 서너번은 통화한다”면서도 “엄마가 씻고 있거나, 설거지하고 있거나, 자고 있거나, 무음이거나 할 땐 전화를 못 받는다”고 했다. 많은 걸 이해해보려고 하는 효빈이었다. 서러운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엄마에게 전화하는 열세살이기도 했다. 효빈이는 ‘본인의 장점’을 묻는 말에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내가 정말 아끼는 사람한테 내 모든 걸 주는 사람이라서 그게 장점인 것 같아요.” 외할머니의 소망은 하나뿐이다. 셋이서, 아니 멀리 있는 엄마까지 넷이서 건강하게 지내는 것. “공부도 잘하고 지금처럼 착하게 지내면 좋겠어요.” 이날도 어김없이 할아버지와 산책하러 나간 효빈이는 빨갛게 물든 노을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에이, 할아버지 못생기게 나왔어.” 효빈이는 깔깔 웃었고, 외할아버지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