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전 올해 30살이 된 여성입니다. 20대에는 공부와 일에 욕심이 많아 연애가 사치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시작해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연애 공백 기간이 길어졌고, 저에게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선을 그었어요. 주위 지인들이 항상 “너는 오는 사람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다”며 문제라고 해요. 이러다 보니 점점 연애 불능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마침 지인이 소개팅을 주선해서 지난 5월초에 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만난 사람은 제가 대화의 흐름을 끊는 얘기를 해도 웃으면서 공감해주고 잘 받아줬어요. 저의 그런 부분 또한 좋게 봐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을 것 같다며 오히려 칭찬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밥 먹으면서 보낸 2시간30분 정도가 금방 지난 것처럼 느껴졌어요. 밥 먹고 난 뒤 그가 2차로 봐둔 맥줏집이 있는데 가도 괜찮으냐고 묻더라고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어디서 오냐는 말에 오늘 부모님 댁에 가야 해서 서울역에서 예매하고 왔다고 말했어요. 열차 시간을 물어서 대답했었거든요.
사실 그때 제가 기차 타고 부모님 댁에 가야 해서 시간이 얼마 없었지만, 그분이 마음에 들었고 더 이야기하고 싶어 맥줏집에 갔어요. 거기서 그가 다음 주 스케줄을 묻더라고요. 저는 부모님 댁 가서 한 달 뒤 서울에 올 예정이었어요. 거짓말은 하면 안 될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하고, 죄송하다고 했더니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 것처럼 말하더라고요. “곧 서울에 오는 거 아니냐”라고 하더군요. 근데 전 또 거기서 바쁘다는 식으로 다른 일정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다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갔고, 기차 시간에 맞춰 급하게 나왔죠. 택시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오늘처럼 날씨 좋은 날에는 청계천을 걸으면 좋을 텐데”라고 하더군요. 전 그 말에 “친구랑 가보기로 했는데, 결국 못 갔다”고 했어요. 이제까지 적극적으로 애정 표시를 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 ‘나에게 큰 호감은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에 같이 가요”라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 택시가 와서 급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기차에 타 떠올려보니 그 사람의 배려나 편안함이 느껴지면서 다음에 또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그에게서 연락이 왔고, 메시지를 주고받다 대화를 마무리했죠. 그 사람이 계속 생각나고 놓치면 후회할 것 같은 생각에 제가 3일 뒤 다시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제 예상과 달리 메시지를 보낸 다음 날 아침에 연락이 왔어요. 제가 혹시 시간 괜찮으냐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는 읽기는 읽었지만, 지금까지 연락이 없어요.
서울에 가면 다시 연락할지 고민이 됩니다. 친구들은 시간 괜찮으냐고 묻는 메시지에도 답이 없는데, 연락을 또 하면 더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할 것 같다고 해요. 그러면 제가 더 상처받을 것 같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 사람이 나에게 마음이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약간 의기소침해졌어요.
만약 곽정은 작가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나요? 진짜 오랜만에 잘해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한 번 본 사람이지만 제가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졌던 적이 많지 않았던 터라 놓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너무 바쁘시겠지만, 저의 고민에 조금이라도 조언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
A ‘연애 불능자’라뇨. 지금까지 공부와 일을 열심히 하고 연애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 그 부분에 미숙함이 남아 있을 뿐인데요. 물론 당신이 20대에 자신에게 집중하며 열심히 노력했던 것은 그 자체로 멋진 일입니다.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는데 억지로 연애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다가오는 모든 사람에게 아예 선을 긋기로 하는 순간,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죠. 당신이 추구하는 ‘성장’이라는 것은 내가 자신을 위해 하는 노력뿐만 아니라 내가 맺는 ‘관계’ 속에서도 얻어지는 것이니까요. 공부와 경쟁에만 내몰리던 10대와 달리, 내가 어떤 친밀한 관계를 맺는가의 문제가 이 시기에 거둘 수 있는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돌아보면 조금 미성숙한 사랑이었다고 해도, 눈물로 점철된 지질한 추억담으로 남는다 해도, 우리의 어떤 부분은 분명히 성장하죠. 너무 연애에만 골몰하는 것도 문제지만, ‘나는 아예 누구도 못 오게 선을 그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좋아서 미칠 것 같은 감정을 먼저 용감하게 표시한 적이 있으신가요?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내 존재를 어필하려고 노력해본 적은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를 원치 않거나 나를 배신했을 때,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해본 적은 있으신가요? 20대에 연애를 시작했다고 한 사람이라도, 서른살이 넘어 이런 상황이 닥쳐오면 고민하고 힘겨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 마흔이 넘었고 이렇게 십수년째 사랑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인데도 여전히 이 문제가 어려워요. 사랑이란 그리고 관계란, 어학 점수를 따거나 악기를 배우는 것처럼 들인 시간에 비례해 기술이 늘어나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나마 20대에는 관계에 대해 미숙한 모습도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지’ ‘20대니까 어려운 거지’라는 말로 다소 너그럽게 용인하지만, 당신은 이미 서른살의 여성이니 사안이 더 복잡해지죠. 주변에선 ‘슬슬 짝 찾아 결혼할 나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 시작할 테고, 당신의 미숙함은 너그럽게 이해되기 힘들 수밖에요.
제가 당신이라면, 소개팅이라는 가장 어색하고 시시한 무대로 자신을 올리는 일을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겁니다. 외모와 한두 시간의 뻔한 대화만으로 제가 ‘예·아니요’의 대상으로 평가당하는 일이 싫거든요. 그보단 여러 명이 함께 만나는 모임에서 누군가를 자연스럽게 만나는 상황을 만들었겠죠. 그리고 설사 소개팅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 달간 고향에 내려가는 일정을 앞두고 소개팅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실 이 부분은 한번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셨으면 좋겠네요. 한 달간 부모님 댁에 내려가는 기차를 타는 날로 소개팅 날짜를 정한 건, 당신이 그동안 해온 ‘선 긋기’의 일환은 아니었는지 말이에요. 당신은 상대방의 감정을 그런 방식으로 테스트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요? ‘나에게 정말로 호감이 있다면 내가 세운 이 장애물을 다 뛰어넘어봐’라고요. 당신이 있는 먼 곳으로 찾아오거나, 당신에게 한 달 내내 열정적으로 연락하기를 바란 건 아닌가요?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큰 호감’의 정체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럼 그땐 서울 올라오겠네요?’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땐 바빠요’라고 답하는 사람이 세운 장애물을 뛰어넘을 그런 사람…. 있을까요? 당신이 편안함과 배려를 받기 원하듯, 그 사람도 편안함과 배려를 바라는 한 인간일 뿐입니다. 대화 도중에 당신의 호감을 어느 정도 표현하셨나요? 그다지 표현하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이 사람도 나에게 호감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는데 상대에게 돌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조금 이상한 사람이겠죠. 당신은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잘될 수 있는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드는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네요.
서른살에 처음 시작해 보려는 연애,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또한 당신이 추구하는 성장에 속하는 것입니다. 철벽을 쌓아 놓고 ‘넘어올 테면 넘어와’라는 자세도, ‘나에게 큰 호감이 있으면 나도 한번 만나 보려고’라는 자세도 당신의 성장에는 유익하지 않겠지요. 나를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나려고 노력하고, 상대방에게 좋은 감정이 든다면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거절당할 때 당하더라도 말이죠. 아, 그런 차원에서 이분에겐 꼭 한 번 더 연락해 보세요. 물론 거절당할 확률은 꽤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이 당신을 거절하는 게, 뭐 그리 또 큰 문제가 되나요? 나를 속속들이 다 알아버린 사람이 나를 배신할 수도 있는 것이 연애고 사랑이던데요.
곽정은(작가)
■ 알림 : 곽정은 작가가 운영하는 프라이빗 살롱 헤르츠의 셀프 러브(Self Love·자존감을 위한 프로그램) 수강권 증정 이벤트에 정인선, 박진아 독자가 선정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