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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책&생각] 반 세기 전 첫 책에 담긴 잊지 못할 기억들

등록 :2022-08-05 05:00수정 :2023-01-02 15:20

나의 첫 책│나태주 시인
1973년 첫 시집 ‘대숲 아래서’
데뷔작 이름 바꿔준 박목월 선생

꼬깃한 돈으로 처음 사주신 어머니
안쓰럽고 아쉽고 아득한 기억들
나태주 시인. 사진 본인 제공
나태주 시인. 사진 본인 제공

사람은 살아가면서 첫 번째 경험을 중시한다. 첫사랑, 첫눈, 첫여름, 첫 만남, 첫 직장 등. ‘첫’이란 접두사가 들어간 말은 모두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인들이 내는 책도 첫 번째 책이 소중하다. 막강한 의미를 부여하며 오래오래 기억의 창고에 간직하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첫 작품을 ‘처녀작’이라고 말하고 첫 시집을 ‘처녀시집’이라고 말하겠는가.

나는 1971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데뷔한 사람이다. 오늘에 이르러 시력 52년. 이제는 우리 시단에 50년 넘은 시인이 부지기수이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그 50년, 반세기란 말 앞에 눈물겨운 바가 있고 무릎을 꿇고 싶도록 가슴 가득 밀려오는 감회가 있다.

지금까지 49권의 창작시집을 출간했다. 하지만 가장 의미 있고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시집은 역시 1973년에 출간한 첫 시집 <대숲 아래서>다. 신춘문예 당선작의 이름이 또 ‘대숲 아래서’. 그러니까 데뷔작 이름을 시집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실은 신춘문예 당선작의 이름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다. 응모 당시 내가 지은 이름은 ‘소곡풍(小曲風)’. 애당초 ‘작은 노래 종류’라는 뜻으로 지은 제목이다. 그런데 선자(選者) 가운데 한 분인 박목월 선생이 그 이름을 바꾸어 ‘대숲 아래서’라고 지어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는 나와 박목월 선생의 합작품이라 할 것이다.

시집 원고를 들고 가서 시집 서문을 청했을 때 선생께서는 흔쾌히 서문을 써주시면서 이런 문장을 딸려주셨다. “묵은 가지에 열리는 그의 알찬 열매는 어느 것이나 오늘의 것으로서의 참신성과 신선미를 잃지 않고 있다. 그런 뜻에서 그의 작품은 누구에게나 친근감과 신선미를 베풀어주리라 확신한다.”

아, 이런 감격이라니! 결국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말씀하시는 건데 나는 그걸 곧이곧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살면서 뒤돌아보니 아, 그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었구나, 깨닫게 되었다. 역시 아둔한 인간은 오래라도 살아놓고 보아야 할 일이다.

나태주 시인. 사진 본인 제공
나태주 시인. 사진 본인 제공

또 시집을 내면서 잊지 못할 분은 전봉건 선생이다. 당시 전봉건 선생은 <현대시학>이란 시 잡지를 주관하면서 시집 출간 대행업도 하고 계셨다. 서울에서 시집을 내고 싶기는 한데 마땅하게 머리 두고 갈 곳이 없었다. 급한 대로 상의드렸을 때 역시 흔쾌히 시집 출간을 맡아주신 분이 전봉건 선생이다.

시집 출간은 당연히 자비출판. 처음엔 국판 120페이지에 중질지 사용, 500부로 계약하였다. 그런데 내가 중간에 억지를 부렸다. 종이를 100g 백색 모조지로 바꾸고 부수도 700부로 바꾼 것이다. 당연히 초과 금액을 드렸어야 했는데 전봉건 선생은 “나형과 내가 그럴 사이가 아니잖소”라고 말씀하면서 돈을 더 받지 않으셨다.

그다음으로 생각나는 분은 우리 아버지. 우리 집은 워낙 가난한 집이라 남아도는 돈이 없었다. 시집 제작비는 16만 원. 쌀 열 가마니 값. 나는 그 돈을 아버지에게서 빌려 쓴 다음 할부로 갚았다. 아버지는 또 그 돈을 농협에서 대신 빌려서 나에게 주셨을 것이다.

서천역까지 기차로 운송된 책을 택시에 실어 막동리 집으로 가져와 마루 위에 놓고 첫 상자를 뜯었을 때 맨 처음 책을 사주신 분은 어머니이셨다. 당신의 반짇고리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어 내 시집을 사주셨다. “내가 네 책을 처음 사주마.” 어머니가 사주신 시집의 가격은 700원. 모두가 안쓰럽고 아쉽고 아득한 대로 그리운 기억들이다.

시인

그리고 다음 책들

막동리 소묘(1980, 일지사)

이 책은 1980년 서울의 일지사에서 나온 나의 세 번째 시집이다. 전년도인 1979년 한국문예진흥원에서 모집한 제3회 ‘흙의 문학상’ 대상을 받은 시들을 모아 낸 책이다. 나로서는 자비출판이 아닌 첫 책인데 이 시집은 4행시로만 된 시 185편이 모인 책이다. 시편마다 제목이 없고 번호만 차례대로 붙어 있어 단조로운 느낌이 없지 않지만 나로서는 초기작품의 집대성이라는 데 뜻이 있다.

풀꽃(2014, 지혜)

이 책은 시선집 형태의 책으로 2014년 대전의 지혜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이다. 그때까지 나온 시집들 가운데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을 선정했다. 전반기 독자 대중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던 내가 조금씩 독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2년 서울의 광화문 글판에 ‘풀꽃’이란 시가 올라가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시선집은 내 시의 대표가(代表價)를 지닌 책이라 할 만하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2020, 지혜)

나의 시선집 가운데 매우 특별한 책이다. 나의 시작품 가운데 인터넷을 통해 독자들의 선택을 받은 작품들만 모아서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래서 ‘인터넷 시집’이란 말을 사용했고 또 시집의 발문과 표4의 글도 인터넷에 오른 독자들의 것으로만 했다. 그런데 이 책이 아주 많이 팔렸다. 국내판매 65만 부. 일본과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번역본 판매까지 합하면 72만 부. 나로서 더는 횡재가 없는 책이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2022, 열림원)

2022년 현재로서는 나의 최근작 시집이다. 2년 반 동안 코로나 19로 시달리며 산 날들의 기록을 담았다. 하지만 오로지 그쪽으로만 특성화된 시집은 아니고 노년에 이르러 돌아보는 내 인생의 파노라마와 남은 소망을 담은 시집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집의 볼륨이 제법 있다. 285페이지. 웬만한 장편 소설 분량이다. 열림원 발행. 그래도 독자들이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한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