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넥슨 사태’에서 남성혐오 논란을 불러일으킨 넥슨 홍보영상 속 장면(왼쪽)과 영화 ‘인어공주’의 한 장면. 메이플스토리 홍보 영상 갈무리,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뉴스룸에서] 이정애 | 스페셜콘텐츠부장
“제가 디즈니에 제일 부러운 건 디즈니는 아이들을 쥐어짜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중략)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디즈니한테 돈을 뜯기죠. 넥슨은 아직 멀었어요. 누군가는 넥슨을 죽도록 미워하잖아요.”
‘집게손가락’ 논란으로 뭇매를 맞고 있는 온라인 게임업체 넥슨을 보고 있노라니, 넥슨의 창업주 고 김정주 전 회장의 이 말(2015년 회고록 ‘플레이’)이 떠올랐다. 그는 넥슨의 게임이 “어떤 이들에게는 불량식품 같은 재미”로 여겨지고 있다며 “풀어야 할 숙제”라고도 했다. 언젠간 그 숙제를 풀어 ‘다음 세대’(Next Generation)에게 사랑받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종합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꿈’이었다.
공교롭게도 김 전 회장이 이끌던 넥슨과 ‘워너비’로 삼았던 디즈니가 최근 ‘다양성’ 이슈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넥슨은 ‘남혐’ 논란이 지적된 콘텐츠를 신속하게 지우고 ‘남혐 페미’로 지목된 하청업체 관계자를 문책했다가
‘페미니즘 사상 검증 동조’ 비판을 받고 있고, 디즈니는 인종·젠더 차별을 극복하자며 ‘흑인 인어공주’ ‘라틴계 백설공주’ ‘동성애 히어로’를 등장시켰다가 맥락을 무시한
‘과도한 피시(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란 논란으로 저조한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양쪽 모두 결과가 좋지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넥슨의 선택은 ‘뺄셈’, 디즈니의 선택은 ‘덧셈’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다양성의 인정과 포용성 증진’이 현대 사회의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기준으로 뒀을 때, 디즈니의 경우 ‘지나쳐서 그렇지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아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고자 했다’는 의도 자체는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넥슨도 “우리 사회의 긍정적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차별과 혐오에 반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번 집게손가락 논란 처리 과정을 보면 긴가민가 싶다. 남초 사이트 일부 이용자들의 주장대로 자사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 영상 속 ‘손가락’ 모양이 한국 남자의 작은 성기를 비하하기 위해 일부러 집어넣은 게 맞다면, 그것은 분명히 규탄해야 할 ‘남혐’이다. 문제는 기초적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도 않고 넥슨이
하청업체의 무릎부터 꿇렸다는 점이다. 하청업체 직원 한명이 일자리를 위협받고 온라인상에서 참기 힘든 괴롭힘을 겪었지만, 넥슨은 내 일이 아니라고 침묵했다. 사실상 하청업체에 책임을 떠넘기고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선언이었던 셈이다. 결과적으론 페미 사상 검증에 나선 ‘손가락 탐정’의 손을 들어주며, 남혐 대신 ‘여혐’을 더욱 부채질한 꼴이 됐다.
더욱 유감스러운 건, 넥슨이 2016년 7월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 이후 줄곧 ‘남혐 의혹 제기→무조건 사과 및 관련자 문책’이란 나쁜 공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소리 큰 몇몇 이용자 한마디에 매출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쩌겠느냐 볼멘소리만 하며, 7년 넘게 논란을 풀어갈 합리적인 대응 매뉴얼 마련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기업의 본질적인 목적은 이윤 추구지만,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은 갈수록 투자가치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넥슨의 이런 모습은 경쟁업체 엔씨소프트와 넷마블 등이 이에스지(ESG) 경영위원회 등을 꾸려 ‘콘텐츠 내 혐오와 차별을 줄이고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기 위해, 개발부터 출시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관련 프로세스를 강화하겠다’며 세부적인 내용까지 공개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국내 상장사가 아니라 당장 2025년에 닥칠 이에스지 정보 공시 의무화에서 비켜 서 있어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
넥슨은 내년이면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불량식품 같은 재미”가 끌어오는 매출에 안주했다간, 앞으론 국내 업계 1위 타이틀을 지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넥슨이 서울 역삼역 4번 출구 근처 오피스텔 ‘성지하이츠 Ⅱ 2009호’에서 시작했던, ‘제2의 디즈니가 되겠다’는 꿈,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콘텐츠로 다음 세대의 글로벌 종합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던 그 꿈에서 다시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넥슨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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