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2013년 10월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굳은 표정으로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공동 취재사진단
우직한 열정·비타협적 성향이 ‘정치’와 만나 위험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또 다른 별명 ‘남순신’…이순신 장군은 구차하게 자리 보전한 적 없어
또 다른 별명 ‘남순신’…이순신 장군은 구차하게 자리 보전한 적 없어
[김종구 칼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별명은 ‘육사 3학년 생도’다. 그것은 분명히 칭찬이다. 이 별명이 표상하는 바는 군인다움, 애국심, 원칙주의, 비타협 등이다. 하지만 ‘육사 3학년’이라는 말을 뒤집어 보면 아직 어떤 단계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함, 미성숙, 아마추어라는 뜻도 된다. 1년 전 그가 국정원장에 임명됐을 때의 느낌도 그래서 이중적이었다. 그의 강골 이미지에서 비롯된 개혁의 기대감의 한편으로, 그가 과연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국정원 업무에 적합한 인물인지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다. 게다가 우직한 열정과 비타협적 성향이 ‘정치’와 만날 경우 그 위험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법이다. 불행히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에서 이런 위험은 현실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간첩혐의 증거조작 사건에서 보여준 남 원장의 리더십은 어떤 것인가. ‘곧이곧대로, 정직함, 원칙대로’가 빛을 발했는가, 아니면 ‘미숙함과 아마추어리즘, 빗나간 열정’이 두드러졌는가. 국정원의 고위 간부를 지낸 몇몇 사람들에게 이 사건에 대한 평가, 국정원장의 리더십 등에 대한 감상평을 물어보았다. 사람에 따라 다소 온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론은 거의 비슷했다. 후자였다.
유우성씨를 간첩 혐의로 기소한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국정원 고위 간부 출신들한테서 이런 반응은 다소 의외다. “간첩 혐의가 그 정도라면 기소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역이용해 북한의 정보를 빼내는 데 활용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 세계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라도 그런 판단을 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사실 검찰과 국정원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유씨의 간첩 혐의라는 것은 보잘것없다. 치열한 첩보전이 펼쳐지고 있는 중국 동북3성 지역에는 이중삼중 스파이들도 적지 않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증거 조작보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이 더 주목하는 것은 ‘증거 조작은 없었다’는 국정원 자체 조사 결과다. 이것은 단순한 지휘감독 소홀의 문제를 떠나 남 원장의 직접적인 개입 여부가 문제가 되는 대목이다. 검찰 수사 결과 증거 조작을 위한 지시와 연락, 팩스 전송 등이 모두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서 이뤄진 사실까지 드러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뻔뻔한 거짓말이다. “국정원장과 감찰실장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 감찰실장은 오직 한 사람, 국정원장의 지시만 따르게 돼 있다.” 국정원의 허위 진상조사는 결국 국정원장의 뜻을 반영한 결과로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남 원장은 박근혜 대통령까지도 속였을까. 박 대통령이 증거조작 사건에 대해 입을 연 것은 국정원 협력자의 자살 기도로 국정원이 더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나서다. 그사이 박 대통령이 남 원장으로부터 어떤 식의 보고를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당시 새누리당 실세들이 계속해서 ‘발급 절차의 문제는 있었지만 내용을 위조한 것은 아니다’는 따위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박 대통령한테 어떤 보고가 올라갔는지를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결국 남 원장은 정직하지도, 유능하지도 않았다. 기민하게 판단해야 할 때 아마추어적 미숙함을 보였고, 원칙대로 처리했어야 할 때 진실을 속이고 비틀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국정원의 총체적 무능함을 만방에 떨친 것이다. 국정원이 이처럼 국제적 조롱거리가 된 적도 별로 없었다. “상황이 이쯤 됐으면 대통령이 당연히 국정원장의 책임을 묻는 것이 정상적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그런 용단을 내릴까. 최근 새누리당 실세들의 발언에 비춰 보면 그 가능성은 아직은 별로 없어 보인다. 국정원의 사후 진실은폐 문제에 대해서는 검찰이 수사 착수조차 하지 않았다.
남 원장의 또 다른 별명은 ‘남순신’이라고 한다. 임지를 옮겨다닐 때마다 집무실에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걸어놓아서 붙은 별명이다. 그렇지만 이순신 장군은 결코 어리숙한 판단으로 패전지장이 되지 않았다. ‘왕의 은총’에 힘입어 자신의 잘못을 면탈받고 구차하게 자리를 보전한 적은 더욱 없었다. 남재준 원장의 선택은 무엇일까. ‘육사 3학년 생도’라는 별명이 칼 같은 군인정신을 발휘하는 쪽으로 갈지,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는 미성숙자의 어리광으로 갈지 한번 지켜볼 일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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