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균 ‘국민모임’ 공동 대표가 지난 12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국민모임 주최로 열린 ‘새로운 정치세력, 왜 필요한가?’ 토론회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죽거나 혹은 바꾸거나’.
사멸 위기에 처한 유기체 앞에는 이 두개의 선택지뿐이다. 자발적 혁신 기회를 허송하고 뒤늦게 ‘타율적 구조조정’을 강요받는 한국 진보정당 세력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두차례의 분당(2008년, 2012년)을 거치며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으로 분화한 진보정당 세력은 지난달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세력 재편이 불가피한 상황에 내몰렸다. 여기에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공직 상실로 치르게 된 4월 보궐선거와 ‘국민모임’으로 대표되는 진보진영 일각의 ‘진보적 대중정당’ 창당 움직임은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잠복해 있던 ‘진보 재편론’에 불을 댕겼다.
진보 재편론의 핵심은 사분오열된 진보세력의 재통합 여부다. 창당 때부터 독자노선을 고집해온 녹색당을 제외하면, 정의당과 노동당 모두 당내 다수파가 과거 한솥밥을 먹던 옛 민주노동당 출신이란 점에서 재결합 여지는 있다. 문제는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생긴 두 당의 복잡한 내부 역학관계에 국민모임이라는 외부 변수까지 겹치면서 통합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진보진영 안팎에서 나오는 통합 시나리오는 크게 세가지다. 옛 민주노동당 계열인 정의당·노동당이 합치는 ‘소통합’, 여기에 재야 국민모임과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등 새정치민주연합 이탈파가 가세하는 ‘중통합’, 그리고 옛 안철수 신당 세력과 통합진보당 이탈파까지 포괄하는 ‘대통합’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통합에 적극적이다. 여기엔 3%대에 정체된 정당 지지율과 야권연대에 부정적인 새정치민주연합 분위기를 고려할 때, 2016년 총선에서 독자생존을 장담하기 힘들다는 속사정도 작용하고 있다.
국민모임 29일 창당 로드맵 공개
노동당 30일 대표 결선투표 변수
원내정당 정의당은 통합에 적극적
소통합·중통합·대통합 세 갈림길
이번주 재편 폭·방향 윤곽 나올듯
정의당 관계자는 “5명의 소속 국회의원이 있지만, 냉정히 말해 지역 선거에 나가 당선을 노려볼 만한 인물은 심상정·노회찬 정도”라며 “한동안 새정치연합과 통합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통합진보당 해산 뒤에는 진보 통합으로 승부수를 던져보자는 흐름이 다수”라고 했다. 옛 국민참여당 출신인 천호선 정의당 대표도 지난 15일 새해 회견에서 “노동당, 국민모임, 정동영 전 장관 등 흩어진 건강한 진보세력을 끌어모으고, 확대·강화시키는 견인차 구실을 하겠다”고 했다. 일종의 ‘진보 빅텐트론’이다.
핵심 변수는 국민모임이 추진하는 신당이 어느 정도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느냐다. 신당이 거물급 정치인과 참신하고 능력 있는 신인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면 통합 논의의 주도권을 쥐고 ‘중통합’을 넘어 ‘대통합’까지 이어갈 동력을 확보하게 되지만, 조기에 좌초할 경우 통합 시나리오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각에선 국민모임이 옛 창조한국당이나 ‘안철수 신당’처럼 제1야당에 흡수되거나 선거를 치른 뒤 소멸 수순을 밟게 될 것이란 비관론도 만만찮다. ‘새로운 진보정당’을 표방하고 있지만 강령이나 노선, 세력 기반 자체가 불투명한 탓이다.
국민모임 쪽은 이런 관측에 손사래를 친다. 양기환 국민모임 대변인은 “과거의 야권 신당이 보수여당과 중도야당의 중간지대에 있었다면, 우리는 진보의 지향점을 명확히 하면서 중도세력까지 포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확실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실제 국민모임엔 과거 진보정당의 정책 조언 그룹에서 활동해온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소속의 원로·중견 학자들(김세균·손호철·강내희·이해영 등), 세월호 농성에 참여했던 문화계 진보그룹(서해성·신학철·정지영 등), 민주노동당 분당 뒤 노동 현장에서 재통합 운동을 추진해온 노동계 인사들(이수호·김영훈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일각에서 생각하듯 ‘돌출적인 명망가 모임’은 아니라는 얘기다.
‘창당 동력’에 대해서도 국민모임 쪽은 “충분하다”고 자신한다. 국민모임 내 신당추진위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26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20여명의 전문가들로 26일 첫 회의를 열어 창당 일정을 구체화한 뒤 29일 기자회견을 통해 참여 인사들의 면면을 밝히겠다”고 했다. 문제는 조만간 공개될 신당 참여 인사들의 ‘라인업’이 안팎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신당 세력이 약하면 정의당이 주도권을 쥐면서 잔여 진보세력을 흡수하는 형태로 갈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되면 통합의 시너지나 감동 역시 제한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다른 변수는 현재 진행 중인 노동당의 당대표 결선투표다. ‘진보 대결집’을 주장하는 ‘통합파’와 ‘독자노선’을 고수하는 ‘사수파’, ‘선 역량강화, 후 통합논의’를 앞세운 ‘자강파’가 경합했던 1차 투표에선 통합파 후보가 40.2%를 득표해 1위를 했다. 그러나 당내 역학구도를 볼 때 통합파의 결선투표 승리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통합파가 당권 확보에 실패한다면 정의당과의 ‘소통합’부터 흔들리게 될 공산이 크다. 현직 국회의원이 없는 원외정당이지만 노동당이 통합 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옛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당직자와 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해온 30·40대 그룹의 경험과 정책 역량은 명망가 중심의 정의당과 국민모임이 갖지 못한 노동당만의 정치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그 판단의 정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종북 논란’과 ‘정파기득권’ 구조에 발목 잡혀 있던 진보진영에 혁신과 재구성의 기회를 제공한 게 사실”이라며 “이 기회를 놓치면 노동당이든 정의당이든, 2016년 총선을 거치며 정당으로서의 존재감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국민모임이 1차 영입 인사와 창당 로드맵을 잠정 확정해 발표하는 기자회견은 29일, 노동당의 당대표 결선투표 마감일은 30일이다. 진보 재편의 폭과 방향을 좌우할 핵심 세력들의 진로 결정이 이번주 안에 마무리되는 셈이다. 말 그대로 ‘운명이 걸린 1주’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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