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을 끈끈한 실 모양으로 방출해 포식자를 물리치는 검은해삼.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부드러운 몸에 동작이 느리지만 해삼은 4억년 넘게 지구 바다에서 살아왔다. 그 비결의 하나는 세계 열대바다에 널리 분포하는 검은해삼 등 일부 해삼 종이 보유한 자기 내장을 포식자에게 쏟아붓는 방어 전략이다.
게가 건드리면 해삼은 항문으로 내장을 쏟아낸다. 수 초안에 이 내장은 가늘고 긴 끈끈한 실로 바뀌어 게의 몸을 감싼다. 마치 물속 거미줄처럼 끈적이고 질긴 줄에 감긴 포식자는 물러서거나 때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잘린 도마뱀 꼬리가 새로 나는 것처럼 방출한 해삼의 내장은 재생된다.
해삼이 내장을 방출한다는 사실은 프랑스 동물학자 조르주 퀴비에가 1831년 발견했다. 이 내장을 ‘퀴비에 기관’으로 부른다. 이 기관은 창자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 옆에 자리 잡고 있지만 실은 호흡계에서 분화했다. 수수께끼의 퀴비에 기관을 분자 차원에서 규명한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검은해삼의 내장과 퀴비에 기관. 팅 천 외 (2023) ‘PNAS’ 제공.
팅 천 중국 남중해 해양학연구소 박사 등은 11일 과학저널 ‘미 국립학술원회보(PNAS)’에 실린 논문에서 검은해삼의 유전체(게놈)를 해독해 퀴비에 기관의 유전적 기원과 분자 차원의 작동 메커니즘을 규명했다고 밝혔다.
게놈 해독 결과 퀴비에 기관의 표면단백질은 거미줄이나 누에고치의 실크와 마찬가지로 아미노산이 길게 반복되는 구조였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진화경로는 다르지만 해삼은 거미나 누에처럼 질기고 끈끈한 점액질 실을 만드는 기법을 독립적으로 고안했다.
검은해삼이 퀴비에 기관을 방출해 포식자인 게를 물리치는 모습을 담은 상상도. 리양 리 제공.
퀴비에 기관의 끈끈한 특성은 다른 동물의 끈끈이와는 달랐다. 뜻밖에도 퀴비에 기관의 점액질을 이루는 단백질은 사람에게 알츠하이머를 일으키는 아밀로이드 단백질과 비슷했다.
해삼이 내장을 방출하는 메커니즘도 밝혀졌다. 게, 물고기, 불가사리 같은 포식자가 해삼의 몸을 건드리면 물리적 압력이 아세틸콜린 신호 체계의 방아쇠를 당겨 내장의 방출을 촉발한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아세틸콜린은 사람을 포함한 많은 동물의 신경전달물질이다.
인용 논문: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DOI: 10.1073/pnas.2213512120
조홍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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