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된 말 ‘늘봄’은 2018년 한국에 수입돼 3마리의 새끼를 낳았지만, 지난 4월 마지막 출산한 새끼가 젖을 떼자 도살장으로 보내졌다. 구조된 말은 제주비건과 협약을 맺은 제주의 말 생크추어리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피타·제주비건 제공
“말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아주 강합니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알고, 다양한 감정 표현을 해요. 기억력이 좋아서 인간과의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동물이죠.”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한 비건카페에서 만난 국제동물권단체 피타(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려는 사람들·PETA) 한나 샤인 수석 조사감독관은 미국의 말들이 한국에 들어와 열악한 환경에서 죽어 나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와 남편 필립 샤인 피타 정책부 수석연구원은 지난 10월30일 동물권단체 ‘제주비건’과 함께 제주시 애월읍 축산물공판장 앞에서 퇴역 경주마 실태 조사를 벌이던 중
16살 ‘늘봄’을 구조했다.
퇴역 경주마 늘봄은 미국에서 태어나 지난 2018년 한국으로 왔다. 이후 번식마로 3마리의 새끼를 출산했지만, 젖을 떼자마자 비육농장으로 보내져 도살장으로 보내졌다. 도살 직전 구조된 늘봄을 보며 한나 조사감독관은 “구조 당시 늘봄은 너무 말라서 갈비뼈와 엉덩이뼈가 다 드러나 있었고, 다리를 닦아주지 않아 온통 배설물이 말라붙어 있었다”고 전했다. 늘봄은 현재 제주비건이 협약한 제주 말 생크추어리에서 보호받고 있다.
지난 6일 국제동물권단체 피타의 필립 샤인(왼쪽) 수석 연구원과 한나 샤인 조사감독관이 한국 경마 산업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들은 세계 각국에서 잠입 조사를 벌이는 활동가로서 얼굴은 공개되지 않길 원했다. 박승연 피디
샤인 부부는 미국에서 수입돼 경마, 번식에 이용되다 도축되는 말들의 현실을 조사하기 위해 2018년부터 5년간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이들은 2019년 공개한 ‘케이-학대(K-Cruelty) : 구타와 도살, 한국의 경마산업’은 당시 한국 경마산업에 대한 국제적 분노를 일으켰고, 북미 최대 경주마 수출 기업은 이후 한국으로의 경주마 수출을 중단했다.
당시 이들이 공개한 영상에는 경기를 마친 지 72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리에 붕대를 감고 실려 온 말, 유명 씨수말의 새끼로 태어난 말 등이 직원들에게 구타당하고 서로가 보는 앞에서 도살당하는 장면 등이 담겨있었다.
구조된 말 ‘늘봄’은 2018년 한국에 수입돼 3마리의 새끼를 낳았지만, 지난 4월 마지막 출산한 새끼가 젖을 떼자 도살장으로 보내졌다. 피타·제주비건 제공
피타와 동물단체는 이러한 배경에 뛰어난 경주마를 생산하기 위해 과도한 번식에 나서는 한국말 산업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한국마사회 말산업정보포털을 보면, 최근 5년간 경주마로 새로 등록된 수는 매해 1100~1400여 마리에 이른다. 이들 중 경마에 적합한 말은 소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3~5살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해 번식, 승마, 교육, 촬영에 활용된다. 이 중 절반 가까이가 도살이나 질병으로 일찍 죽음을 맞는다. 은퇴한 말을 관리하려면 사료, 훈련, 보호에 매달 150여 만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하는데, 마주들이 부담을 꺼리기 때문이다.
4년이 지났지만, 샤인 부부는 늘봄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의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마사회는 피타의 폭로 이후 말복지위원회를 신설하고 지난해 1월 ‘경주 퇴역마 복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그러나 동물단체들이 꾸준히 주장하고 있는 경주마들의 탄생부터 전 생애를 관리할 이력제나 은퇴 뒤 복지를 보장할 방안은 내놓지 않고 있다.
한나 샤인 피타 조사감독관이 지난 10월30일 제주시 애월읍 제주축협 축산물공판장 앞에서 구조한 말 ‘늘봄’의 당시 건강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늘봄은 구조 당시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상태였다. 박승연 피디
한나 조사감독관은 “이전에는 경주 퇴역마들의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던 한국마사회가 2019년 이후엔 도살 내역을 숨기고 ‘폐사’로 표기하기 시작했다”고 오히려 은퇴마 복지에 역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필립 수석연구원은 “최근 한국마사회와 농협, 경기도 안성시가 협약을 맺고 ‘안성팜랜드’에 퇴역마 10마리를 위한 휴양 공간을 마련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건 한해 퇴역하는 1400여 마리의 말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로 ‘보여주기’일 뿐이다”고 덧붙였다.
한나 조사감독관은 경주마 복지 체계 마련의 근본적인 한계가 ‘축산’을 담당하는 부처에서 관리하는 한국 말산업 구조에 있다고 봤다. 그는 “한국마사회는 농림축산식품부 산하에 있다. 농림부는 동물의 복지를 추구하기보다 동물을 가축, 축산물로 다루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부처다. 그러다 보니 마사회가 경마, 도축 등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대다수가 다시 동물 착취를 홍보하는 데 쓰이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나 샤인 피타 조사감독관과 필립 샤인 수석연구원이 지난 10월30일 제주시 애월읍 제주축협 축산물공판장 앞에서 구조한 말 ‘늘봄’의 당시 건강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박승연 피디
이들은 한국마사회가 개선 의지만 있다면 말 복지 체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필립 수석연구원은 “미국은 주마다 관련 법이 다르지만 한국은 말산업 자체를 정부 기관이 주도하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실질적이고 강력한 복지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다.
피타는 퇴역 경주마들의 비인도적 도살 현장을 폭로한 2019년 이후 한국마사회에 경주마들이 경기에서 얻은 상금 3%를 은퇴 뒤 복지자금으로 마련하는 방식의 퇴역마 복지 프로그램을 제안해왔다. 미국, 영국, 홍콩 등에서는 경마협회 혹은 조교사·기수 등이 일정 금액을 내 퇴역 경주마들의 노후 복지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한나 조사감독관은 “사람들도 은퇴 시기를 대비해 임금의 일정 금액을 연금으로 마련해둔다. 경주를 위해 태어나 인간을 위해 달린 말들도 은퇴 이후의 삶을 위해 상금의 일정 금액을 기금으로 조성하는 것은 합리적인 대안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