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사는 국제적 멸종위기종이지만 유해야생동물이기도 한 고라니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 ‘이름보다 오래된’이 출간됐다. 문선희 작가, 가망서사 제공
반짝이는 두 눈, 매끈한 코, 복실거리는 귀가 귀엽다. 책을 가득 채운 ‘작은 사슴’ 고라니의 초상은 유치원 졸업앨범 같기도, 어느 초등학교의 출석부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귀 모양도 털빛도 눈빛도 심지어 ‘표정’도 다 제각각이다. 자연스레 질문이 솟아오른다. ‘우리가 지금껏 고라니의 얼굴을, 그들의 고유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구제역·조류도감 매몰지를 찾아 인간의 살처분 정책에 의문을 던졌던 작가 문선희씨가 이번엔 고라니의 초상을 들고 왔다. 고라니는 그가 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대상이다.
2013년부터 10년간 200마리의 고라니를 만났다. 그중 50여 마리의 얼굴을 모아 사진집 ‘이름보다 오래된’을 최근 출간했다. 고라니 연작은 2023년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고라니로 끌어당겼을까. 지난 2일 오후 서울 정동 한 찻집에서 애니멀피플과 만난 문 작가는 고라니와의 첫 만남은 마치 ‘구조 신호(SOS)’와 같았다고 했다.
왜 고라니였나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신 거예요.
“10년 전 출근길이었어요. 운전 중이었는데 사슴 한 마리가 도로로 튀어나왔고 영화처럼 눈이 마주쳤어요. 표정이 강렬했어요. 뭔가 제가 구해줘야 할 것 같이 몹시 급박해 보였어요. 그러곤 다시 산 방향으로 뛰어갔는데 잠시 있으니 하얀 개들이 사슴을 뒤쫓고 있었어요. ‘선녀와 나무꾼’에서 왜 나무꾼이 사슴을 숨겨줬는지 알겠더라고요. 저도 바로 뒷좌석에 숨겨주고 싶었을 정도였거든요. 그 잔상이 온종일 남았어요.”
어린 고라니들의 초상. 어린 고라니들은 새끼 때 어미와 떨어져 야생동물구조센터에 들어오게 된 개체들이다. 문선희 작가, 가망서사 제공
그러나 작가는 사슴과 마주친 뒤 깨달았다. 자신이 고라니라는 이름만 알았지 이 동물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고라니와 노루조차 구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작가는 그날 마주친 사슴이 고라니란 걸 깨닫고 고라니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고라니의 어떤 점에 끌리신 거죠?
“다시 고라니를 만나고 싶었어요. 고라니는 중국 극히 일부와 우리나라에만 서식하는 멸종위기종이에요. 그런데 제가 고라니를 만나고 싶다고 하면 ‘유해동물이다’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로드킬을 일으킨다’는 말을 주로 들었어요. 또 매년 18만 마리가 포획된대요. 말이 포획이지 살펴보니 사살이었어요. 멸종위기종인데 환경부가 지정한 유해야생동물이라니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해가 안 갔거든요.”
고라니 200마리를 만났다고 하셨어요. 고라니는 어딜 가면 만날 수 있나요?
“천덕꾸러기에 흔하디흔한 사슴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야생에서 고라니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어요. 고라니가 선호하는 곳이 바로 배산임수 지형이에요. 사람하고 같아요. 그런 곳을 다녀보니 이미 골프장, 캠핑장, 요양병원이 들어차 있어요. 서식지를 빼앗긴 거죠. 전 세계 사슴이 다 있는 동물원에 가도 고라니는 없었어요. 그러다 야생동물구조센터에 구조된 고라니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지난 2일 오후 서울 정동의 한 찻집에서 문선희 작가가 고라니 사진들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고라니를 만나기 위해 작가는 10년 전부터 여러 야생동물구조센터와 국립생태원을 드나들었다. 초여름엔 그해 봄에 태어나 어미를 잃은 새끼들이 구조되는 지역 야생동물구조센터로, 겨울엔 사고를 당하고 재활하고 있는 어른 고라니들이 있는 국립생태원의 사슴생태원으로 갔다.
고라니들 첫인상이 어땠나요?
“못생겼구나. (웃음) 고라니는 못생긴 사슴이구나. 야생동물구조센터로 처음 고라니를 만나러 갈 때, 저는 막연히 디즈니 만화의 아기사슴 밤비 같은 얼굴을 상상했던 것 같아요. 근데 고라니는 상상한 귀여움에는 살짝 못 미쳤어요. 노루는 눈도 크고 키도 키고 길쭉한데, 고라니는 눈도 코도 오밀조밀하고 몸집도 고작 진돗개만 해요. 이래서 외면받나 싶었죠.”
그런데도 얼굴 초상을 찍으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야생동물구조센터 방사장 문을 열면 새끼 고라니 반은 깡충깡충 뛰어오고, 반은 풀숲에 가서 숨어요. 성격이 다 제각각이거든요. 우유 들고 온 재활치료사인 줄 알고 와서 얼굴을 비비고 반기는 거예요. 그렇게 여러 번 방문하다 보니 친해져서 제가 가면 옆에 엎드리고 신발 끈 물고 장난치는 애들이 생겼어요.
어느 날 저도 완전히 엎드려 고라니를 봤어요. 그렇게 눈높이를 맞췄더니 완전히 다른 얼굴이더라고요. 순박하고 평온하고, 정감 가는 얼굴이었어요. 얼굴 하나하나 다 다르고, 귀여웠죠. 못생겼다고 생각한 건 위에서 내려다봤기 때문이란 걸 깨닫고, 이 얼굴을 모두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야생동물의 얼굴을, 게다가 카메라와 시선을 마주치는 동물의 초상을 찍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야생동물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시선을 피할 뿐 아니라 눈길이 마주치면 공격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문 작가는 그러나 마주 보는 시선을 고집했다. 우리가 고라니를 보는 게 아니라, 고라니의 시선이 우리를 보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제 사진이 아니라 사진 속 고라니가 직접 말하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어른 고라니의 초상. 어른 고라니들은 충남 서천 국립생태원의 사슴생태원에서 보호 중인 고라니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문선희 작가, 가망서사 제공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한여름에는 방진복을 입고 똥과 진드기가 뒹구는 바닥에 누웠고, 겨울엔 야생에 가까운 생태원에서 추위로 곱은 손으로 카메라를 붙잡고 버텼다. 400㎜ 이상의 렌즈나 플래시를 쓸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장비는 오직 ‘시간’이었다. 고라니 스스로 경계를 풀고 다가오길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고라니가 경계를 거두는 순간이 찾아왔다. 3~4년이면 마칠 줄 알았던 작업 기간이 10년으로 늘어났다.
문선희 작가는 사라져 가는 동물인 고라니의 단 하나뿐인 얼굴을 담는 작업에 집중했다. 문선희 작가, 가망서사 제공
유독 기억에 남는 고라니가 있다면.
“‘초코’를 잊을 수 없어요. 저에게 처음 경계를 풀고 다가와 준 아기 고라니거든요. 생태원에서 만난 어른 고라니 ‘망고’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곤 했어요. 수의사 선생님들은 동물들에게 표정이 없다고 해요. 인간처럼 얼굴 근육이 발달해 있지 않아서 사슴은 표정을 짓지 못한다는 거예요. 제가 느끼기엔 안 그랬어요. 어쩌면 제가 세계 최초의 고라니 관상가가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죠.”
문선희 작가는 구제역·조류인플루엔자 매몰지를 기록한 ‘묻다’,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시민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등을 작업해 왔다. 문선희 제공
10년간의 시리즈예요. 작품을 마무리하고 무슨 생각이 드셨어요.
“저는 꼬마들(어린 고라니) 사진을 찍고 졸업 앨범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영정 사진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힘들었어요. 제가 만난 고라니 중에 지금 살아있는 애들이 몇 마리나 있을까요. 초코는 평소엔 명랑하고 태평했는데 오후 4시 무렵이 되면 무서운 꿈을 꾼 것처럼 화들짝 놀라고 별안간 막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고 그랬어요. 마치 쫓기는 꿈을 꾼 것처럼요. 한 번은 ‘헤드 쇼크’라는 사고 트라우마로 결국 안락사당한 고라니를 만난 적도 있어요.”
작품을 마주할 관객과 독자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조금 시간을 내서 고라니 하나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마음속에 질문이 하나 생겼으면 좋겠어요. 적정 개체 수란 무엇일까.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고 해서 어떤 동물을 유해동물로 규정하고 인위적으로 없애는 것이 맞나. 태곳적부터 살아온 서식지에서 내몰린 고라니의 관점에서 인간은 무엇일까.”
환경부의 ‘야생동물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고라니의 총 개체 수는 약 45만 마리다. 매년 유해야생동물 구제사업으로 목숨을 잃는 고라니가 18만 마리, 로드킬로는 6만 마리가 사라진다. 포획과 로드킬로 매년 고라니의 절반 가까이가 죽는 것이다.
고라니 현상금은 3만원, 피해액은 마리당 1만5000원
“총을 쏘는 대신, 고라니 식비를 대면 어떨까요”
문선희 작가는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된 고라니의 문제를 감정적으로만 접근하긴 싫다고 했다. 고라니 포획 문제를 알리기 위해 10년간 많은 논문과 데이터를 수집했다. 사진집 ‘이름보다 오래된’에는 고라니들의 초상뿐 아니라 고라니 현황과 국내 정책, 문제점 등이 담겨있다.
그가 정리한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고라니를 포획하는 유해야생동물 피해방지단(피해방지단)에게 지급되는 현상금은 고라니 농작물 피해액에 두 배에 달한다. (2018년 기준) 2011년 피해방지단이 포획한 고라니의 마릿수는 1만9000여 마리로 고라니 한 마리당 농작물 피해액은 연간 11만원꼴이었다. 현상금은 5억9000만원이 지급됐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고라니 포획 수는 매년 1만 마리 이상 증가세를 보인다. 그러나 2014년에는 포획 마릿수가 3만7000여 마리로 증가하고, 포획 4년 만에 피해액은 마리당 3만원꼴로 낮아진다.
2015년부터는 현상금으로 지급되는 비용(약 30억 원)이 고라니로 인한 농작물 피해액(약 20억 원)을 앞지르는데 이런 흐름은 2018년까지 변함이 없다. 2018년에 이르러 고라니 한 마리가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금액은 1만5000원이다. 포획 비용은 마리당 3만원이 지급됐다.
문선희 작가는 이런 포상금이 정작 손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음에 쓰인 비용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그동안 농작물 피해액은 산정만 됐을 뿐, 실제 보상액 지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야생동물로 인한 피해가 소규모로 반복되기 때문에 보상 지급 기준을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자체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고라니의 피해 보상은 대략 피해 면적 100㎡(30.3평) 이상, 피해 금액 5만원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
그는 누군가는 이런 부조리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작가는 “1년에 1만5000원어치를 먹어치워서 죽어야 한다니 그 식비를 마련하는 운동을 벌이고 싶을 정도다. 애초에 농민의 피해를 덜기 위해 실시한 정책이라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야생동물의 개체 수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의 위험성도 간과되고 있다고 했다. 야생동물의 절멸은 급격히 진행되고, 한 개체군의 규모가 일정 수준 이하로 감소해 유전적 다양성이 떨어지면 전염병이나 재해가 찾아오면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호주 산불로 코알라가 갑자기 위기에 처한 사례를 든다. 우리나라에만 주로 서식하는 고라니가 이 땅에서 사라지면, 고라니는 절멸할 수 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