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디스페이스에 전시된 작품 ‘투게더’ 앞에서 정은혜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정 작가는 2008년 이후 10여년 간 가려진 동물의 삶을 도자 조각으로 표현해 왔다.
잠든 수평아리를 업은 어미 닭의 얼굴은 평온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젖소는 보조기에 기대 웃고 있다. 장바구니를 짚고 선 돼지의 모습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할머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자하게 미소 짓는 황소, 돋보기를 든 염소도 마찬가지다.
다 늙어 우리네 노인의 모습처럼 변한 소, 닭, 돼지의 모습은 낯설다. 동물들은 미처 늙기 전에 도축 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동물의 미래를 구워낸 작품들이 인간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늙어 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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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대 가장 고통받는 존재 ‘동물’
가려진 동물의 목소리를 흙으로 빚어낸 이는 도자 조각가 정은혜씨다. 2008년 태국 여행 중 트레킹 코끼리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착취당하는 동물들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됐다는 그는 이후 10년 넘게 동물의 삶을 표현하는 작업에 천착해 왔다.
도대체 무엇이 오랜 기간 그를 동물에 집중하게 했을까? 2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디스페이스’에서 열린 그룹전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오프닝 행사에서 정 작가를 만났다.
닭, 소, 돼지, 젖소 등 축산동물들의 늙은 모습을 조각한 ‘너는 늙어 봤느냐’ 시리즈. 정은혜 작가 제공
반려견 ‘뭉치’와 15년째 동거를 하고 있다는 그는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한 입 먹고, 한 입은 개에게 나눠줄 정도였다. 어쩌면
‘파잔’(새끼 코끼리를 어미에게 떼놓기 위해 행하는 길들임 의식)으로 상처 입은 코끼리가 마음 깊숙이 들어온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부터 보기 시작했어요. 대학원에서 논문 주제를 정할 때인데, 인간이 동물에게 하는 잔혹한 행위들에 대해서 알게 됐죠.”
동물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아졌다. 대학원 시절, 그는 주로 인간과 동물의 처지를 뒤바꾼 작품을 만들었다. 코끼리가 사람을 등에 태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 등에 코끼리가 타고 있다거나(‘서커스 유랑단’) 사람이 담비의 털을 취하듯, 담비가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거울을 보고(‘담비의 화려한 외출’), 실험실 쥐가 주사위를 들고 인간의 표본 앞에서 웃고 있는(‘실험실’) 식이다.
인간과 동물의 처지를 뒤바꿔 동물착취 문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동물의 반란’ 시리즈. 정은혜 작가 제공
“흙으로 동물을 빚으면서 동물의 입장이 되어 보는 거예요.” 대학원 졸업 뒤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그는, 자주 왜 이 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지 자문했다고 했다. “이때, 본질적인 대답을 얻게 된 것 같아요. 목소리 내기 힘든 존재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리고 현시대 가장 고통받고 힘없는 존재들이 바로 동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동물도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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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목소리, 물결치듯 일어나길”
2014년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랬듯 그에게도 ‘세월호’라는 큰 상처가 다가왔다. “가라앉지 않는 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등파고랑’ 시리즈다. 다도 용어인, 등파고랑(騰波鼓浪)은 북을 치듯 물결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등파고랑 시리즈는 모두 60척의 배로 이뤄져 있다. 정 작가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손으로 일일이 배 한 척 한 척을 만들어 시리즈를 완성했다.
물결처럼 푸른 배 위에는 저마다 동물들이 타고 있다. 횃불을 든 양, 나팔을 부는 돼지, 기도하는 닭과 낮잠에 빠진 고양이 가족까지. “동물들도 모두 생김새가 다 다르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개별적인 존재잖아요. 그런 것을 나타내고 싶었어요. ‘나도 생명이 있어요’라고 말하듯이. 표정이나 동작을 모두 다 다르게 만들었죠.” 비록 진지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정 작가의 작품은 어둡지 않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만들기 시작한 ‘등파고랑’ 시리즈. 정은혜 작가 제공
등파고랑 작품 속 동물들은 모두 평온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항해를 즐기고 있다. 최근까지 발표된 연작 시리즈들도 맥을 같이 한다. 나이가 들기 전 죽음을 맞는 축산동물들의 노년을 표현한 ‘너는 늙어 봤느냐’, 젖소가 우스꽝스러운 요가 동작을 선보이고 있는 ‘Untitled’, 지폐에 중요한 역사적 인물을 새기듯 동전에 동물의 얼굴을 찍어 넣은 ‘Coin’ 등은 정 작가 특유의 재치와 유머를 담고 있다.
“소나 닭, 돼지 같은 공장식 축산에 희생되는 동물들에 특히 마음이 많이 갔어요. 동물들 가운데서도 가장 목소리가 내기 힘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저의 작업 속에서나마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닌 평온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만들었어요.” 동물을 의인화한 작업이 어떻게 읽힐지 걱정이 된다면서도, 그는 “인간과 동물이 다른 존재가 아님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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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생명력을 불어넣다
하나의 동물 형상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흙으로 쌓아 올려 빚고, 1000℃가 넘는 가마에서 서너 차례 굽고 식히기를 반복해야 완성된다. 정은혜 작가는 도자 조각을 ‘자연으로 자연을 빚는 일’이라고 했다.
“도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거쳐야만 완성이 되죠. 가마에 들어가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어요. 오로지 상상하면서 기다리는 거예요. 흙이 불과 만나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랄까요.”
정 작가는 “앞으로도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동물들의 삶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전했다. 정은혜 작가 제공
그가 최근 집중하는 재료는 동물의 뼈다. 지난주 마장동에 가서 소머리뼈를 이고 지고 왔다. 그는 그날, 어쩐지 서러워 내내 울다가 뼈 위에 흙으로 눈, 코, 입을 빚고 나서야 기분이 나아졌다고 했다.
“단돈 5천원 헐값에 팔리는 이 뼈를 제가 값지게 만들어 동물의 희생에 보답하고 싶어요.” 오는 15일부터 열리는 서울 강남구 학동
‘갤러리 세인’ 기획공모전에서 그의 작품 등파고랑을 만날 수 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