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반도 남부 지브롤터 해협에서 범고래가 사람이 탄 배를 공격하는 일이 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애피레터 구독신청하기 : 검색창에 ‘댕기자의 애피레터’를 쳐보세요.
인간과 보트를 향한 복수일까, 영리한 포식자의 놀이일까.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범고래가 사람이 탄 배를 공격하는 일이 늘고 있다.
미국 공영 라디오 <엔피알>(NPR)과 외신들이 최근 지브롤터 해협에서 범고래의 공격을 받은 관광선박 선장의 사연을 14일(현지시각) 전했다. 20년 경력의 선장 댄 크리즈씨의 관광 선박은 지난 4월 범고래에 의해 ‘또 다시’ 망가졌다. 그는 2020년에도 범고래의 공격을 받아 보트가 망가져 항구로 견인된 경험이 있다.
댄 크리즈 선장이 에스엔에스(SNS)에 공개한 범고래의 공격 장면. 인스타그램 @catamaranguru 제공
크리즈 선장이 공개한 영상을 보면, 범고래 한 마리가 조용히 보트 후미로 접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범고래는 이내 보트 아래로 들어가 작동 중이던 방향타를 능숙하게 입에 물고 사라졌다. 방향타는 프로펠러 뒤쪽에 달려 있는데 배의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한다. 크리즈 선장은 “범고래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방향타 이외에 것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엔피알>에 말했다.
그의 배뿐이 아니다. 2020년 5월 범고래들의 공격이 시작되고 난 뒤 비슷한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2022년 6월과 11월에는 범고래의 공격으로 두 척의 배가 침몰했으며 5월 초에는 심하게 손상된 배가 해안으로 예인되던 중 침몰했다. 지난달에만 20여건의 사건이 발생했는데 대부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어린 범고래 3마리(혹은 4마리)가 배로 접근한 뒤 방향타를 공격해 떼어낸 뒤 달아나는 것이다.
범고래들은 왜 보트를 노리게 된 걸까. 지난해
국제학술지 해양포유류과학(Marine Mammal Science)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이곳에서 관찰된 범고래는 총 31마리로 보트를 따라다니는 행동을 보인 범고래들은 두 그룹으로 나뉜 9마리였다.
엄마와 남매 범고래의 ‘합작’
두 그룹은 각각 한 마리의 암컷과 그들의 딸, 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로 어린 범고래들이 방향타를 공격하는 동안 어미 고래들은 이 모습을 감독하듯 배에서 떨어져 있는 모습이 관찰됐다. 기본적으로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행동했지만 배와 상호작용을 할 때는 함께 관찰되기도 했다.
지브롤터 해협의 보트에 접근하는 범고래들은 두 그룹으로 나뉜 9마리로 나타났다. 나이든 암컷과 그들의 새끼로 구성된 두 그룹의 행동은 ‘화이트 글래디스’(Gladis Blanca)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추측된다. 루스 에스테반·대서양범고래연구그룹 제공
연구자들은 ‘화이트 글래디스’(Gladis Blanca)라고 불리는 성체 암컷이 공격을 주도한다고 보고 있다. 화이트 글래디스가 불법 조업이나 관광 중인 선박의 보트에 충돌하거나 덫에 걸리는 등 충격적인 사고를 겪고 보복 행동을 보이자 나머니 어린 개체들이 이를 모방하게 된 것이란 추측이다.
논문의 공동저자인 포르투갈 아베이루대학 생물학자 알프레도 로페즈 페르난데스 박사는 “범고래들이 배를 공격하는 기원이나 동기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방향타를 떼어가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일종의 트라우마로 인한 방어 행동이라는 확신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고 과학전문 매체 <라이브 사이언스>에 말했다.
무해한 공격, 그냥 ‘유행’일까?
그러나 범고래와 배의 조우가 대부분은 무해했다고 전했다. 그는 “2020년 이후 범고래와 배의 상호작용이 기록된 것은 500건 이상이다. 이 중 침몰한 배는 3척이었다. 범고래는 평균적으로 100척 중 단 한 척의 배에만 접촉했다”고 했다.
또한 범고래의 행동이 단순한 놀이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덴마크 생물학자 한네 스트라거 박사는 과학매체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재미있기 때문에 배에 접근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밝혔다. 범고래가 주로 배에만 집중하고, 배가 가라앉아 사람들이 구명보트에 올라타도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전역에 분포하는 범고래들에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새로운 행동이 시작됐다가 갑자기 중단되고 또 다른 행동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관찰됐다. 범고래 연구자들은 이를 ‘유행’이라고 부른다.
알래스카에서는 범고래들이 한 시간 넘게 지느러미로 다시마 조각을 끌고 다니면서 헤엄치거나 해파리를 주둥이 물고 가능한 오래 헤엄치면서 먹지 않고 붙잡고 노는 모습이 목격됐고, 얼음 위에서 쉬고 있는 작은 새나 바다표범을 때리거나 놀리는 모습도 종종 관찰된다.
범고래 무리가 백상아리를 무리 지어 사냥하는 모습. 크리스티안 스톱포스 제공.
연구자들은 동기가 무엇이든지 유행이 지속되면 인간과 고래 모두에게 좋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앞선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범고래는 높은 인지능력을 지니고 있고 사회적 학습을 통해 보트의 공격을 쉽게 따라할 수 있다. 현재 9마리가 보이고 있는 이 행동이 더 큰 무리에게 전파가 된다면 지브롤터 해협을 오가는 수많은 선원과 멸종위기에 처한 범고래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범고래는 해양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로 물고기는 물론 고래, 바다표범, 새, 북극곰 등을 먹이로 삼는다. 고도의 지능과 강한 동료의식으로 늑대처럼 협동 사냥을 벌이는데 자신보다 곱절 이상 큰 대왕고래나 같은 상위 포식자인 백상아리를 조직적으로 사냥해 잡아 먹는다. 많은 경험을 갖춘 나이든 암컷을 중심으로 모계사회를 이루며 무리들끼리는 독특한 언어, 방언 등을 가지고 있다.
인용 논문: Marine Mammal Science, DOI: 10.1111/mms.12947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