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는 겨울에 얼지 않은 여울을 찾아 무리를 지어 잠을 잔다. 2015년 2월 강원 철원에서 잠자리에서 나온 두루미들이 밤새 꽁꽁 언 몸을 풀며 부리를 하늘로 쳐들고 큰 소리를 내고 있다. 김진수 한겨레21 기자 jsk@hani.co.kr
지난달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설전을 벌였던 확성기들이 철거되고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비무장지대가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만들어진 비무장지대 일대는 역설적이게도 야생동식물에게 지구상에 둘도 없는 천혜의 피난처이자 서식처가 되었다. 특히 지구상에 3000여마리만 남아 있는 두루미 중 1200여마리가 월동하는 비무장지대 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서식처 가운데 하나다.
지난겨울 강원 철원에만 930여마리의 두루미가 월동했다. 그런데 원래부터 철원에 이처럼 많은 두루미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찾아와 두루미를 연구해온 미국 국제두루미재단의 조지 아치볼드 박사에 의하면 당시 철원 일대에는 100여마리가 좀 넘는 두루미가 월동하고 있었다. 이후 철원에 찾아오는 두루미 수는 1990년대 들면서 갑자기 늘어났다.
북한에서 두루미 사라진 이유
왜 그랬을까? 북한에서 날아온 ‘탈북 두루미들’이 철원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철원에서 북쪽으로 70㎞가량 떨어진 함경남도 안변에 넓은 들판이 있는데, 그곳이 북한의 대표적인 두루미 월동지로 북한에서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곳이다. 안변에는 1984년 220마리, 1988년 140마리, 1990년 70마리의 두루미가 월동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1997년 이후에는 찾아오는 두루미가 없었다.
1990년대 들면서 소련이 붕괴하자 비료를 생산하기 위한 석유화학제품을 북한으로 지원해주던 것이 끊겨 북한의 농업 생산성이 낮아졌다. 게다가 연달아 닥친 홍수 등의 자연재난으로 북한의 식량난이 가중됐고, 북한에서는 가능한 모든 땅을 개간하여 농지로 활용하고 수확 뒤 논에 남겨지는 낟알도 없게 됐다. 이 때문에 두루미들은 서식할 공간과 먹이를 잃어버렸고, 북한을 떠나 철원으로 넘어온 것이다.
2000년 6월에 있었던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사이에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등 각종 협력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러자 두루미를 보호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기존의 한국 내 두루미 월동지인 철원 등 접경지역에 대한 개발 압력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2009년 11월 북한 함경남도 안변군 비산협동농장의 논에 내려앉은 두루미들. 국제두루미재단 제공
국제두루미재단은 2005년 무렵부터 북한 학자 등과 접촉하면서 북한 쪽에 두루미 대체 월동지를 복원시킬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2008년 3월에는 아치볼드 박사가 북한을 방문하여 주요 두루미 월동지인 금강산 북쪽의 안변을 찾아가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북한 당국의 주요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로서 ‘안변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사업이 2008년부터 시작됐다. 이 사업의 목적은 안변의 두루미 서식 환경을 복원하고 먹이 공급을 개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외국의 몇몇 단체들이 기금을 조성하여 현지에서 농업 활동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교육하고, 각종 장비와 시설을 제공하여 식량 생산을 늘리고자 했다.
국제두루미재단과 독일의 한스자이델재단 등이 정기적으로 기금을 보냈으며, 북한 국가과학원의 학자들은 현장을 조사하고, 주민들을 교육했다. 두루미 월동지였던 비산협동농장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농업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도록 퇴비 제조 시설을 새로 만들었으며, 관개수로를 건설했다. 땔감 생산용 버드나무를 심고, 과일나무도 6000여그루 심었다. 주민들에게 양질의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해 양어장과 양계장 등의 축산 시설도 새로 만들었다.
협동농장의 주민들을 위해 40가구의 주택을 비롯해 유치원과 사무용 건물, 200석 규모의 교육장 등을 만들었다. 국가과학원의 도움으로 유기농업 관련 매뉴얼을 만들고, 비산협동농장의 몇몇 인원은 중국으로 농업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인간-새 공존하는 안변평야
한편 이동 중인 두루미들을 다시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두루미 모형을 만들어 들판에 놓아두고 녹음된 두루미 소리를 틀어주었다. 사육 중인 두루미 두 마리도 들판에 내놓아 야생 두루미들을 유인하도록 했다. 겨울철에도 무논을 조성해 물새들이 찾아오게 했으며, 작은 연못을 몇 개 만들고 물고기 등을 키워 두루미가 잡아먹을 수 있도록 했다. 두루미 보호지역 주변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사업이 시행된 지 두해째인 2009년 11월12~13일에는 총 42마리의 두루미가 안변에 잠시 머물다 갔다. 2011년에는 72마리가 11일 이상 머물다 갔는데, 이 가운데 5마리는 3주일 동안 머물렀다. 2013년에는 35마리, 2015년에도 116마리가 머물다 갔다.
이제 비산협동농장은 북한 내 최고의 유기농업 시험장이 되었다. 조선중앙텔레비전과 노동신문, 지역 신문 등이 안변에서 시행되는 유기농업과 두루미 보호 활동을 보도했으며, 2012년과 2013년 사이에만 5만여명이 비산협동농장에 견학 와서 유기농업 관련 교육을 받았다.
한해 5만달러 안팎의 그리 많지 않은 기금이 씨앗이 되어 어려움에 처했던 사람과 두루미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15년을 끝으로 외부 단체의 지원은 중단되었지만, 이러한 사업 방식은 북한의 다른 주요 두루미 서식지와 협동농장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북과 북-미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두루미와 다른 야생동물들도 함께 살 수 있는 다양한 협력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마용운 객원기자·굿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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