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참여예산제를 통해 지난해 5월 대전 유성구 진잠동에 설치된 농약병 수거함에 한 주민이 빈 병을 넣고 있다. 대전 유성구 제공
[충남·강원 쏙] ‘주민참여예산제’ 우린 어디까지 왔나
주민참여예산제가 의무화된 지 세해째에 접어들었다. 강원·충북·충남에선 아직은 형식만 갖춘 양상인 데 견줘, 대전 유성구에선 주민들의 참여와 반향이 남다른 것 같다. 어찌 된 일일까?
“엄마들이 ‘저 그림 우리 애가 그린 거야’라며 사진도 찍고 자랑도 하고 그래요.”
대전 유성구 노은2동에 사는 신기염(44)씨는 2011년 두 아이가 다니던 반석초등학교의 학부모회 활동을 했다. “어느 날 학교 행정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주민들이 동네에 필요한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보내면 심사를 거쳐 채택해준다는 거였다. 신씨는 평소 산책하던 길의 지족교를 떠올렸다. 다리 밑 교각이 회색 시멘트로 어두컴컴한데다 중고생들이 욕설 따위를 스프레이로 마구 써놓아 눈살을 찌푸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들 교육에도 좋을 리 없었다.
“지족교 교각 꾸미자” 주민 제안
아이들과 직접 타일에 그림그려
농약병으로 골치 앓던 진잠동
수거함 설치 제안해 숙원 해결
학교에 건의해봤지만 예산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어쩌지 못하던 즈음이었다. 구청 누리집에서 제안서를 내려받아 사업 계획과 필요한 이유 등을 꼼꼼히 적어 보냈다. 얼마 뒤 노은2동 주민센터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제안서를 낸 이들이 모여 있었다. “제안서가 9개인가 들어왔는데, 예산 액수나 사업 효과 등을 돌아가며 발표했어요. 그러고는 모인 사람들이 전자투표로 어느 게 가장 좋은지 선택했고요.” 신씨가 낸 제안서는 참여 주민 70%가량이 찬성해 그 자리에서 선정됐다.
이듬해 5월 신씨가 낸 제안서는 ‘지족교 환경 디자인 사업’으로 현실이 됐다. 칙칙한 교각에 구에서 1800만원을 들여 제작한 화려한 그림 타일을 붙인 것이다. 그림 타일을 만들고 교각에 직접 붙이는 과정도 모두 주민 참여 방식이었다. 반석초 3학년 학생들을 비롯해 주민들이 직접 그린 194장이 교각을 산뜻하게 바꿔놓았다. 남택영 대덕대 교수팀은 착시효과를 주는 기법을 활용한 기차·잠수함 타일도 붙여 산책길의 또다른 재미를 더했다. 예전엔 주민참여예산제가 있는 줄도 몰랐다는 신씨는 “쓰레기도 더러운 데 버리지 깨끗한 데는 못 버리잖아요. 교각에 아기자기한 그림이 붙어 있으니 낙서도 자연스레 없어졌어요”라며 즐거워했다.
도심 속 농촌 유성구 진잠동에 사는 정헌재(54)씨도 주민참여예산제로 ‘숙원사업’을 해결했다. 6000여㎡에 포도 농사를 짓는 정씨는 빈 농약병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마땅히 둘 데가 없다 보니, 공터에 수북하게 병이 쌓이기 일쑤였다. 비바람을 그대로 맞으니 병에서 농약이 새어나와 땅이나 물을 오염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참다못한 그는 구에 농약병 수거함 설치를 제안했다. 지난해 5월 진잠동 곳곳에 수거함 20개가 거짓말처럼 들어섰다. 정씨는 “올해는 수거함에 모인 농약병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 건축을 제안할 예정이에요. 그린벨트라서 건축에 제한이 많은데 구에서 꼭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성구 주민참여예산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진화하고 있다. 시범 운영을 시작한 2011년부터 타운미팅(주민·구성원 등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회의) 방식의 동 주민회의를 도입해 9개 동마다 주민 60여명이 모여 직접 사업을 제안하고 그 자리에서 전자투표로 결정하도록 했다. 올해는 동 주민회의 인원을 80명으로 늘리고 주민참여예산액도 동별 3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늘릴 참이다. 예산학교도 일회성이 아니라 관내 주요 행사가 열릴 때마다 ‘찾아가는 예산학교’ 방식으로 이뤄진다. 지루한 이론 강의는 최대한 줄이고 공연 형식을 도입해 재미와 이해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방침이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주민참여예산제를 천편일률적으로 예산 부서가 맡는 관행도 과감히 깨뜨렸다. 예산보다 주민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제도의 취지에 더 걸맞다는 판단 아래, 직접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자치행정 부서로 업무를 이관했다. 예산에 대한 자문과 예산학교 운영, 조례 개정 등 주민참여예산제 전반의 효율적인 운영을 돕기 위해 구의회와 시민단체, 전문가 등이 모인 주민참여예산연구회도 운영할 계획이다. 허태정 유성구청장은 “주민들이 처음엔 제도를 낯설어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이해도 높아지고 지역 현안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특히 주민들 스스로 결정권을 갖게 되면서 사업에 직접 함께하는 경우가 많아져, 초기 관변단체 중심에서 지금은 실제 생활단체들의 참여가 더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갈길 먼 주민참여예산제 강원, 주민의견을 ‘참고’로만 여겨
충북, 주민참여위 예산배정 ‘0’원
충남, 예산참여위원수 대폭 줄여 충청·강원권 광역지방자치단체의 주민참여예산제는 대부분 ‘빈껍데기’ ‘빈털터리’인 게 현실이다. 단체장의 진정성, 주민들의 참여, 제도 운용을 위한 교육·이해 등 주민참여예산제를 떠받치는 ‘삼각 고리’가 부실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2011년 7월 관련 조례를 제정한 강원도는 주민참여예산위원회 구성 조항조차 조례에 없다. 도는 지난해 예산 편성에 주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도민 3335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정책 공모도 벌여 33건이 제안됐다. 대학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여한 분야별 예산정책 토론회도 열었다. 하지만 어떤 정책에 예산이 투입됐는지 알 수가 없다. 도에서 주민들의 참여를 ‘참고’로만 여기는 탓이다. 조례에는 ‘주민은 예산 편성과 관련된 의견을 제출할 권리만 갖고 있다’고 못박혀 있다.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자체가 없으니, 분과위는 물론 예산학교 등도 전무하다. 정부 평가의 기준이 되는 조례 제정에만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예산 심의·의결권을 침해당하는 것으로 여기는 지방의원들의 입맛에 맞게 의원 발의로 조례가 제정됐기 때문이다. 강원도 관계자는 “조례 자체에 위원회 결성 등의 내용이 빠져 있으니, 주민들의 의견만 수렴하는 수준”이라고 털어놨다. 충북에서도 ‘무늬만 주민참여예산제’에 그치고 있다. 주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조례 규정과 달리 주민참여위원들이 쓸 수 있는 예산은 한푼도 없다. 참여위원들의 권한도 미리 짜인 예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그친다. 이마저 도의회에서 ‘예산은 의회 고유 권한’이라며 가위질하기 일쑤다. 주민참여위원 60명 가운데 도지사와 시장·군수가 48명을 위촉하고 12명을 공모로 선발했지만 지역 안배를 핑계로 전문성 있는 후보들은 대거 탈락했다. 예산학교도 열리지만 형식적이라는 지적이다. 충남도 또한 2011년 11월 관련 조례가 제정되는 과정에서 도의원들이 조례안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도민 참여예산위원회 위원 수를 100명에서 40명으로 줄였고 주민 공개모집 조항은 삭제해버렸다. 예산학교 설치·운영 문구도 사라졌다. 대전시도 참여위원 구성을 공개모집이 아닌 기관별 추천으로 제한해 제도 운용의 묘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는 올해 첫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선영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지금 상태의 주민참여위원들은 거수기 노릇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권한도 역할도 책임도 목소리도 없는, 한마디로 참여 없는 참여예산제도다”라고 꼬집었다. 전진식 오윤주 박수혁 기자 seek16@hani.co.kr
산뜻하게 변한 지족교 교각.
아이들과 직접 타일에 그림그려
농약병으로 골치 앓던 진잠동
수거함 설치 제안해 숙원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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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 먼 주민참여예산제 강원, 주민의견을 ‘참고’로만 여겨
충북, 주민참여위 예산배정 ‘0’원
충남, 예산참여위원수 대폭 줄여 충청·강원권 광역지방자치단체의 주민참여예산제는 대부분 ‘빈껍데기’ ‘빈털터리’인 게 현실이다. 단체장의 진정성, 주민들의 참여, 제도 운용을 위한 교육·이해 등 주민참여예산제를 떠받치는 ‘삼각 고리’가 부실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2011년 7월 관련 조례를 제정한 강원도는 주민참여예산위원회 구성 조항조차 조례에 없다. 도는 지난해 예산 편성에 주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도민 3335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정책 공모도 벌여 33건이 제안됐다. 대학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여한 분야별 예산정책 토론회도 열었다. 하지만 어떤 정책에 예산이 투입됐는지 알 수가 없다. 도에서 주민들의 참여를 ‘참고’로만 여기는 탓이다. 조례에는 ‘주민은 예산 편성과 관련된 의견을 제출할 권리만 갖고 있다’고 못박혀 있다.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자체가 없으니, 분과위는 물론 예산학교 등도 전무하다. 정부 평가의 기준이 되는 조례 제정에만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예산 심의·의결권을 침해당하는 것으로 여기는 지방의원들의 입맛에 맞게 의원 발의로 조례가 제정됐기 때문이다. 강원도 관계자는 “조례 자체에 위원회 결성 등의 내용이 빠져 있으니, 주민들의 의견만 수렴하는 수준”이라고 털어놨다. 충북에서도 ‘무늬만 주민참여예산제’에 그치고 있다. 주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조례 규정과 달리 주민참여위원들이 쓸 수 있는 예산은 한푼도 없다. 참여위원들의 권한도 미리 짜인 예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그친다. 이마저 도의회에서 ‘예산은 의회 고유 권한’이라며 가위질하기 일쑤다. 주민참여위원 60명 가운데 도지사와 시장·군수가 48명을 위촉하고 12명을 공모로 선발했지만 지역 안배를 핑계로 전문성 있는 후보들은 대거 탈락했다. 예산학교도 열리지만 형식적이라는 지적이다. 충남도 또한 2011년 11월 관련 조례가 제정되는 과정에서 도의원들이 조례안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도민 참여예산위원회 위원 수를 100명에서 40명으로 줄였고 주민 공개모집 조항은 삭제해버렸다. 예산학교 설치·운영 문구도 사라졌다. 대전시도 참여위원 구성을 공개모집이 아닌 기관별 추천으로 제한해 제도 운용의 묘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는 올해 첫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선영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지금 상태의 주민참여위원들은 거수기 노릇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권한도 역할도 책임도 목소리도 없는, 한마디로 참여 없는 참여예산제도다”라고 꼬집었다. 전진식 오윤주 박수혁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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