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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주모자로 몰려 억울한 죽음, 73년만에 해원 가능할까

등록 2021-07-13 04:59수정 2021-07-13 08:45

송욱 전 여수여중 교장 딸의 비원
진압군 ‘민간인 총지휘자’ 지목…군법회의 회부 소식 뒤 종적 끊겨
지난 1일 오후 전남 화순군 사평면 벽송리 한 야산의 아버지 묘지 앞에 선 송순기씨. 정대하 기자
지난 1일 오후 전남 화순군 사평면 벽송리 한 야산의 아버지 묘지 앞에 선 송순기씨. 정대하 기자

주검 없는 빈 무덤엔 잡초가 무성했다. 지난 1일 오후 전남 화순군 사평면 벽송리 한 야산의 아버지 묘지 앞에 선 송순기(83·광주시)씨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의 아버지는 1948년 10월19일 일어난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주모자로 몰렸던 송욱(본명 송옥동·1916~?) 여수여중 교장이다. 그의 아버지의 주검은 73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송씨는 이날 “아버지, 특별법이 통과됐대요. 특별법이…”라며 울먹였다.

아버지에 대한 몇가지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난리 속에 군인(진압군) 지프가 여수여중 교장 관사 앞에 섰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차고 있던 시계를 끌러 건네면서 “나 죄 없응께, 금방 올 거요”라며 집을 나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 나이 만 32살, 송씨 10살 때였다.

당시는 여수 14연대 병사들이 10월19일 제주 진압을 위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군이 들어왔을 때였다. 14연대가 출동을 거부한 뒤 제주에선 주민 3만여명이 학살되는 참극(제주4·3)이 벌어졌다. 여수동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송씨는 “오동도 쪽에 갇혀 있던 아버지에게 밥을 가지고 갔다”고 기억했다.

송욱 여수여중 교장.
송욱 여수여중 교장.

송욱 교장을 여순사건 주모자로 몬 것은 이승만 정권이었다.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법과를 졸업한 뒤 1938년 서울 상명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던 송욱 교장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송욱 교장은 1946년 광주서중 교감을 거쳐 여수여중으로 영전해 간 지 1년여 만에 여순사건을 맞았다. 그런데 여순사건을 진압한 정부와 국방부는 여순사건 ‘민간인 총연합 지휘자로 송욱 교장을 지목했다. 육군참모장 정일권 대령은 10월26일 국방부 출입기자단에 “여수 반란 총지휘자는 여수여중 교장”이라고 발표해버렸다.

이승만 정권은 여수군인민위원회 선전 벽보를 빌미로 송욱 교장을 여순사건 주모자로 몰았다.
이승만 정권은 여수군인민위원회 선전 벽보를 빌미로 송욱 교장을 여순사건 주모자로 몰았다.

송욱 교장이 주모자로 몰리게 된 빌미는 한장의 벽보였다. 14연대가 여수를 장악한 뒤 재조직한 여수군인민위원회는 10월22일 대강연회를 기획했다. 그리고 지역에서 신망을 얻고 있었던 송욱 교장과 인민위원장 이용기가 연설자로 참석한다는 전단을 거리에 붙였다. 하지만 송욱 교장은 이 대강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여순사건 당시 송욱 여수여중 교사 사연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여순사건 당시 송욱 여수여중 교사 사연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여순항쟁 연구자 주철희 박사는 “당시 <부산신문> 정영모 기자가 변복하고 오동도 수용소에 잠입해 송욱 교장을 취재했던 기사가 남아 있다”며 “10월31일치 <부산신문> 기사에서 ‘왜 반란의 총지휘자가 됐느냐?’라는 질문에 송욱 교장은 ‘나는 전혀 관여한 적이 없다. 연설을 의뢰하였으나 아직 원고가 준비되지 않아 그날 연설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고 말했다. 주 박사는 “정부와 국방부가 당시 군인 봉기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민간인 봉기에 군인들이 가담한 사건으로 규정했고) 송욱 교장을 민간인 총지휘자로 등장시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송욱 교장의 사건을 다룬 &lt;부산신문&gt; 기사.
송욱 교장의 사건을 다룬 <부산신문> 기사.

14연대 군인들과 함께 광주로 이송된 송욱 교장이 대전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됐다는 신문기사는 있지만, 재판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당시 여수여중 국어 교사였던 전병순은 여순사건 최초의 장편소설 <절망 뒤에 오는 것>에서 송욱 교장을 구하지 못한 부채의식을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 1일 오전 광주시 동구 계림동 자택에서 아버지 송욱 교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딸 송순기씨. 정대하 기자
지난 1일 오전 광주시 동구 계림동 자택에서 아버지 송욱 교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딸 송순기씨. 정대하 기자

남은 가족들은 온갖 고초에 시달려야 했다.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기차 화물칸을 타고 광주로 이사한 가족들은 가난을 달고 살았다. 딸 송씨는 “어머니가 삯바느질하며 겨우겨우 살았다”고 했다.

송욱 교장 집안에선 1998년 선산에 고인의 가묘를 조성했다. 지난달 29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는 소식을 듣고 장녀 송씨가 용기를 냈다. 송욱 교장의 가족이 인터뷰한 것은 73년 만에 처음이다. 송씨는 “아픈 기억 때문에 그날 이후로 여수엔 한번도 안 갔어요. 이제라도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길 바랄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송욱 여수여중 교장의 진실을 밝히는 데 힘을 쏟았던 현대사 연구자 박동기씨(오른쪽)가 지난 1일 송 교장의 장녀 송순기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대하 기자
송욱 여수여중 교장의 진실을 밝히는 데 힘을 쏟았던 현대사 연구자 박동기씨(오른쪽)가 지난 1일 송 교장의 장녀 송순기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대하 기자

여순사건 당시 약 일주일간 몰아친 ‘폭풍우’로 1만5천~2만5천명이 희생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공무원·지주 등도 ‘봉기군’에 의해 희생됐지만, 대부분은 ‘빨갱이’로 억울하게 몰린 민초들이었다. 주철희 박사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유족 1세대는 대부분 돌아가셨기 때문에 피해 신청을 받아서는 피해 규모를 확인할 수 없고, (특별법 통과에 따라 출범할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직권으로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주철희·박동기씨 제공

▶ 바로가기 : 여순사건 특별법 통과…‘73년 통한’ 풀 길 열려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10014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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