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시민군 염동유씨가 23일 광주광역시 자택에서 5·18 때 흔들었던 태극기를 꺼내보고 있다. 정대하 기자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전두환이 죽다니….
23일 아침 아파트 지하기계실에 내려가다 5·18단체에서 보낸 문자를 보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40년을 내 몸에 붙어 괴롭혔던 이름, 바로 전두환이다. 전두환이 오래오래 살아 진실 앞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때는 전두환이란 이름도 몰랐다. 화순에서 중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광주로 와 다방 주방장으로 일했는데, 5월18일 고향 집에 다녀오는 길 대인동 터미널에 내렸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군인들한테 얻어맞았다. 이튿날 오후부터 시위에 참여했다. 21일 금남로 앞 집단발포 때 전일빌딩 앞에 있었다. 세 사람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눈이 뒤집혔다. 시민군 거점이 된 전남도청에서 회수한 총에서 총알을 빼는 일을 했다. 도청으로 들어오는 주검들 염도 했다. 총에 맞아 푸르뎅뎅해진 주검에서 나던 그 냄새란….
1980년 상무대 영창 군법재판정에 선 염동유씨(둘째 줄 가운데 안대를 낀 청년).
5월27일 10일간의 항쟁 마지막 새벽을 도청에서 맞았다. 바지 뒷주머니에는 이름과 주소가 적힌 쪽지가 있었다. 집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죽으면 누군지는 알리고 싶었다.
시민군 기동타격대 3조. 도청 정문 앞에서 동지들이 공격을 당했고, 내 쪽으로도 총알이 쏟아졌다. 손을 들고 항복했다. 등엔 ‘총기 소지자’란 딱지가 붙었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군인들은 다리를 펴서 앉으라고 한 뒤 지근지근 밟았다. 곡괭이 자루로 때렸다. 군 법정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해 3년형을 받았다. 상고를 준비하던 중 특별사면으로 밖으로 나왔다. 81년 4월3일이었다.
5·18 시민군 염동유씨가 23일 설비 담당을 하는 광주광역시 서구 한 아파트 단지 기계실에서 일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광주를 뜨고 싶어 서울로 갔다. 그곳에서 전씨가 대통령이 됐다는 뉴스를 봤다. 자괴감이 들었다. 사람을 학살한 자가 대통령이라니…. 1986년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다시 광주를 찾았고, 자연스레 동지들을 만나면서 5·18 진상규명 투쟁에 나섰다. 1987년 6월항쟁 땐 서울 명동성당에서 삭발투쟁도 했다. 2019년 전두환이 광주 재판정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근무 때문에 가지 못했다.
2019년 국회 앞 농성장에 선 염동유씨. 염동유씨 제공
전두환은 평생 나를 따라다닌다.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밤이면 다리가 찌르듯 아파 잠을 잘 수가 없다. 밤중에 몸이 요동치면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다가 울부짖곤 한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모두 열세차례 허리와 다리 수술을 받았지만, 소용이 없다. 죽을 것 같은 고통에 극단적인 선택을 세번이나 시도했다. 정신이 깰 때마다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이가 골프를 치고 재판정에서 꾸벅꾸벅 졸다니, 조롱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전두환이 죽다니, 먼저 간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다만 지금도 5·18 때 소형버스를 타고 다니며 흔들었던 태극기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해마다 5·18항쟁 기간 동안 조기로 내걸기 위해서다. 그렇게라도 억울하게 숨져간 동지들을 추모한다.
(*)이 기사는 5·18 시민군 염동유(65)씨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했습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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