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김소영의 그림책 속 어린이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야누시 코르착 원작, 이지원 옮김/사계절(2021) <어린이의 왕이 되겠습니다>라니, 제목만 보아서는 신나는 내용의 그림책 같다. 표지에 그려진 어린 왕은 얼핏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의 채도가 낮아 조금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지만, 일단 ‘어린이’와 ‘왕’이 나란히 있으니 순진한 내용을 기대하기 쉽다. 어린이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왕 이야기일까? 어른들처럼 정치적 계산에 얽매이거나 협잡을 부리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어린이들 이야기일까? 그런 내용이라면 간단하게 독자에게 통쾌함을 안길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주인공 ‘마치우시 왕 1세’는 실패한 왕이다. 글자도 쓸 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그는 전쟁을 겪고 어른 정치인들과 대립하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고군분투하다가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개혁을 단행한다. 그리고 어른의 정치는 어른에게 맡기고, 자신은 ‘어린이의 왕’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어린이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듣고 실행하는 왕이 되기 위해서 마치우시는 잠을 줄여가며 일했고 어린이들의 지지도 받았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마구잡이 요구가 혼란을 일으켰고, 마치우시는 ‘자신이 만든 신문’만 읽느라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왕 노릇은 결코 놀이가 아니다. 이 그림책은 어린이 인권운동의 선구자 야누시 코르착이 1923년에 쓴 동화 <마치우시 왕 1세>를 원작으로 한다. 마치우시가 끝내 성공하는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는 그가 무인도로 유배되는 결말에 당황했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절, 목숨을 건질 기회를 거절하고 스스로 어린이들과 함께 수용소행을 선택한 작가가 이렇게 냉소적인 이야기를 썼다는 게 이상했다. 솔직히 불편했다. 그래서 그림책을 펼칠 때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 책을 반복해서 읽은 것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 덕분이다. 그의 그림은 한 번만 봐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차분한 색조로 유머부터 절망까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면서 독자가 그 뜻을 자꾸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종이 같은 왕관 위에 위태롭게 올려진 의자는 너무 크고 거기 앉은 마치우시는 너무 작아서 인형처럼 보인다. 왕관을 목에 걸고 대신들에게 호통치는 마치우시는 그저 떼쓰는 어린아이다. 노련한 대신들은 가느다란 줄로 덫을 놓아 왕이 넘어지기를 기다린다. 왕관은 광대, 경찰, 비행사의 모자가 되기도 하고 낙하산이나 사자의 이빨이 되기도 한다. 그림의 의미를 헤아리다 보면 어느새 코르착의 의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대체 실패한 ‘어린이 공화국’ 이야기를 왜 썼을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창조적 재해석 덕분에 나는 실마리를 찾았다. ‘왕’이라는 독단적인 지배자의 한계, 마치우시가 적절히 교육받지 못했다는 사실, 어린이들이 스스로 판단하는 법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한계. 이 그림책 안에는 어린이들과 토론할 것이 너무나 많다. 이 말은, 2021년의 어린이는 개혁에 성공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림책이 하는 일이 이렇게 대범하다. 독서교육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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