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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름은 집이니까요

등록 2021-09-03 04:59수정 2021-09-03 09:55

[한겨레Book ]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l 민음사 (2019)

35년 전 프랑스로 해외입양이 되어 파리에서 연극배우이자 극작가로 살아가는 ‘나나 ’는 오래전 한국에서 ‘문주 ’였던 시절이 있다 . 한국의 대학생 서영은 나나의 신문 인터뷰를 읽고 그의 사연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한다 . 처음 서영의 제안에 회의적이었던 나나는 헤어진 연인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자신의 기원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행을 결심한다 .

나나는 한국 체류 중 무엇보다 자신이 ‘문주 ’로 불렸던 시절의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데 , 그것은 철로에 버려진 서너 살 나나를 발견해 1년 정도 키워주었던 어느 기관사가 붙여준 이름이다 . 나나는 자신이 발견되었던 청량리역과 기관사와 그 어머니가 살았던 아현동 집 , 그 집을 떠나 프랑스에 입양되기까지 2년 정도를 ‘에스더 ’로 살았던 인천의 고아원 등 과거 자신이 거쳐 갔던 여정을 되밟으며 ‘문주 ’의 기원에 닿아간다 . 그 과정에서 나나는 자신의 이름만이 아니라 타인의 이름을 묻고 기억하는 일 , 스쳐 간 지명을 묻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일에도 몰두한다 . 나나가 이토록 이름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마 서영이 보낸 메일 속 문장 때문일 것이다 .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 여기는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

나나처럼 처음부터 제 이름이 없었거나 이름을 잃어버린 타자에게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환대의 출발점이자 정수가 된다 . 철로에 버려진 어린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끝내 집으로 데려간 기관사의 환대를 짐작하며 나나는 다소 폐쇄적이었던 마음에 타인의 이름들을 허락하기 시작한다 . 나나가 머무르는 이태원 집 1층 ‘복희식당 ’의 주인 추연희는 나나가 해외입양아 출신임을 알고 음식을 해 먹이는 등 눈에 띄게 잘해준다 . 연희는 나나에게 벨기에로 입양 보낸 흑인 혼혈 소녀의 사진을 보여주고 나나는 그런 연희를 자신의 생모처럼 ‘지켜 주고 키우는 대신 버리고 도망가 버린 ’ 사람으로 여기고 거리를 둔다 . 이렇듯 소설 전체에 두 개의 입양 이야기가 교차하며 ‘문주 ’로 살았던 시절의 흔적과 이태원 미군 기지촌 여성들이 통과했던 아픈 현대사가 나나의 시선으로 조명된다 .

배 속 아기에게 ‘우주 ’라는 이름을 붙여준 나나는 자신에게 도래한 새로운 세계를 환대하기 위해서라도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은 자신의 기원을 향해 시선을 돌릴 용기를 냈을 것이다 .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생모보다 자신을 구해서 1년간 키워 주고 ‘문주 ’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기관사를 더 궁금해하는 것은 자신의 기원을 유기가 아닌 환대로 규정하고자 하는 나나의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 문주에서 우주로 , 기관사에서 추연희로 확장되어 가는 환대의 실천은 소설 속 문장처럼 시혜가 아닌 의무와 예의로 자리매김한다 . ‘추연희 , 그리워할 수 있어서 행복했던 사람 , 나는 이제 그 이름을 내 삶이 끝날 때까지 기억할 것이다 . 그 이름을 망각하지 않는 것 , 그것은 우주를 키우는 일과 함께 내가 이 세계 앞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가 되리라 .’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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