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신념과 사랑에 진심일수록 상처받은 당신에게

등록 2021-09-24 04:59수정 2021-09-30 00:58

정주하고 싶었으나 떠돌아야 했던
존재에게 자신의 방 내준 사람들
타인 곁에서야 비로소 들었네
평생 듣고 싶던 내 진짜 목소리

완벽한 생애
조해진 지음 l 창비 l 1만4000원

소설이 방이라면, 조해진의 소설은 해 질 무렵 약한 햇빛이 잔물지는 고요한 방과 같다. 창밖이 어두워지자 이 방엔 하얀 햇빛을 닮은 주광색 형광등 대신, 주황 노을빛을 닮은 은근한 간접조명들이 켜진다. 여느 집처럼 내부를 대낮만큼 환하게는 밝히지 않은 이 방. 그래서 더 잘 보인다. 창밖이, 머물러 있는 곳 너머의 세상이.

조해진의 소설은 “타자의 소설”(신형철 문학평론가)이라 불린다. 소설집 4권, <완벽한 생애>를 포함해 장편소설 5권을 펴낸 17년 동안 그는 소수자, 이주자, 결핍되고 배척당하는 ‘평범’한 존재를 환대하고 사려 깊은 문장으로 기록하는 독보적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타자의 소설가’와 함께 자아의 조도를 낮추며 바깥을 응시하는 동안, 삿된 허무와 찬 고립감으로부터 우리는 스스로를 자주 구했다. 타인을 응시하려 노력할 때 자신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된다는 소중한 역설도 얻을 수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떠돌게 된 자다. 떠도는 삶을 원한 게 아니었다. ‘윤주’는 늘 가족이 한집에 모여 사는 미래를 꿈꿨다. 부모님이 고깃집에서 일하느라 이모들 집을 전전하며 십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라디오 작가로 일하던 방송국을 떠난 뒤 제주로 향하는 윤주. 2년 넘게 함께 일한 피디와 아나운서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윤주와 계약을 끝내고 싶어 하는 피디에게 아나운서는 여동생이라 한번 생각해보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전한다. 피디가 한다는 말. “내 동생은 로스쿨 다니는데.” “윤주씨도 법대 출신이잖아요.” 아나운서의 대꾸까지는 참을 만했다. 그런데 둘은 “충분히 농담의 요건을 갖췄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때문이었다. (…) 한 사람의 생계를 놓고 그렇게 웃지만 않았어도” 윤주는 증발하듯 일터를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윤주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에어비앤비에 숙소로 내놓은 서울 원룸을 쓰게 된 ‘시징’. 홍콩에서 왔다. 윤주의 집을 서둘러 예약한 이유는 그곳이 영등포였기 때문이다. 6년 전 시징의 곁을 떠난 연인 ‘은철’의 고향, 영등포. 2014년 홍콩 민주화시위(우산혁명)에 참가했던 시징이 우산 한번 펴보지 못하고 터진 최루탄에 주저앉았을 때, 그를 일으켜 대피시킨 사람이 은철이었다. 은철은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한 뒤 은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버지를 피해 아시아 국가들을 떠돌고 있었다. 여행자 은철은 시징의 집에서 살게 된다. “함께 요리한 음식을 나눠 먹고 서로의 몸을 만지며 잠드는 하루하루만으로도, 그러니까 열망이나 격정 없이도 사랑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시징은 은철을 만나 배우게 되었다.

윤주를 제주로 부른 ‘미정’. 법대를 나와 인권법재단 간사로 일하다가 제주에서 신공항 건설 반대운동 활동가로 지내던 참이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되지 않았다’. 미정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이다. “아버지 역시 베트남 민간인 마을을 불태웠는지, 그곳에 살던 남자들을 죽이고 (…) 아내들과 아이들을 총검으로 내리친 게 맞는지”,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건지, 미정은 “몰랐고 모르고 싶었”다. 외면했기에 떳떳하지 않았으므로, 정의를 판단하고 불의를 벌하는 위치에 자신을 둘 수 없었다. “신념”이 꿈을 포기하도록 만든 셈이다. 미정은 ‘보경 언니’의 초대로 제주에 올 수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나란히 “타인의 방”에 머무른다. 그러니까 자신의 공간에 타인을 들인다. 보경 언니가 연결해준 숙소에 미정이, 미정의 숙소엔 윤주가, 윤주의 원룸엔 시징이, 시징의 집엔 은철이 깃든다. 고유한 삶과 장소가 교차될 때 펼쳐지는 풍경을 통해 소설은 성찰하는 인물을 그린다. 현실의 흑막을 확인하는 데서 그친다면 조해진이 아니다. 짙은 장막에 빛이 비춰지고, 독자는 한 걸음이라도 성장하는 인물을 본다. 가령, 미정에게 제주에서 보낸 시간은 “신념을 잘게 나누는” 중요한 전환기가 되어주었다. 꿈을 삼켰던 그의 신념이 실은 “커서 공허했던 신념, (…) 빈틈 많은 신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제주도청 앞 천막촌에 모이던 ‘타인’들을 떠올린다. 나무와 숲을 사랑하는 사람, 행정 절차에 이의가 있는 사람, 시민운동을 연구하는 사람, 그냥 활동가 밥 먹이려고 온 사람…. “확실한 건 미정처럼 신념을 크게 생각한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타자의 소설가’ 조해진이 새 장편소설 &lt;완벽한 생애&gt;를 펴냈다. “생애는 완벽할 수 없고 완벽할 필요도 없다”는 그는 이 작품에서 결함과 미비함으로 인해 “또다른 투신과 조절과 희망으로 다시 완벽으로 나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타자의 소설가’ 조해진이 새 장편소설 <완벽한 생애>를 펴냈다. “생애는 완벽할 수 없고 완벽할 필요도 없다”는 그는 이 작품에서 결함과 미비함으로 인해 “또다른 투신과 조절과 희망으로 다시 완벽으로 나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방”은 내면의 공간적 은유로 읽힌다. 타인이 내면에 있다는 의미는 ‘나’와 타인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인데, 이 결속은 오직 존재의 세계에서 이뤄진다. 시징이 은철을 어루만지면서, 그의 현존을 오직 감촉하면서, 존재의 확인이 전부라는 지극함 속에서 “사랑”의 “완성”을 배웠듯이. 소유의 세계에서는 이 가치에 부합하는 행위가 없다. “너무 혼자 있지 마. 생애의 끝을 미리 가정하지도 마. 사실은 네게 꼭 하고 싶은 말이었어.” 윤주네 방에서 잠든 시징의 환시 가운데 건네진 은철의 이 말은, 타인과 같이 있어야 반드시 좋다는 뜻이 아니리라. 종잡을 수 없는 생에서, 아름다운 일은 타인과 함께 일어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제주를 떠나면 갈 데가 없다는 미정이 윤주에게 물어본다. 그게 내 잘못이냐고. 윤주는 미정의 맞은편에 앉아 웃었다. “마지막 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그 말….” 윤주 역시 평생 듣고 싶었던 말을, 이제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듣게 된 것이다. 미정의 곁에서야, 비로소 말이다.

조해진은 “신념을 따르고 사랑에 진심일수록 상처받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상처와 방황은 어둡겠지만, 이 이야기는 어둡지 않다. 그림자의 가장자리를 보라. 빛이 있는 한, 그 끝은 환한 곳과 닿아 있으니.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1.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지난해 가장 많이 들은 ‘팝’ 2위가 뉴진스 슈퍼내추럴이라고? 2.

지난해 가장 많이 들은 ‘팝’ 2위가 뉴진스 슈퍼내추럴이라고?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 3.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4.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밴드 인기 끌더니…록 음악 스트리밍도 껑충 5.

밴드 인기 끌더니…록 음악 스트리밍도 껑충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