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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녀는 혼자였다

등록 2021-09-24 05:00수정 2021-09-24 10:00

[한겨레Book]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l 문예출판사(2018)

배낭에 짐을 챙겼다. 핸드폰 충전기, 로션, 잠옷, 블루투스 스피커. 현관을 나서려는데, 중요한 걸 깜빡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샌들을 벗고 들어가 책장 앞을 서성였다. 몇 년 전 훑어본 뒤에 구석에 꽂아놓았던 책 한 권을 품에 안았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19호실로 가다>. 집을 나온 나는 걸어서 5분 거리의 숙소에 도착했다. 713호. 이곳이 며칠 동안 머물 나만의 공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단정하게 정리된 하얀 이불과 큰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큰 창 너머로 하늘을 보았다. 주위가 고요했다. 비혼을 지향하지만, 오랫동안 누군가와 생활을 공유해온 나에게 침묵은 낯선 감각이었다. 반려인, 반려견과 쭉 동거하다가 출장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 며칠간 혼자 지내는 건 정확하게 11년 만이었다.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쩌면 이유가 없는 게 이유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고, 탓할 사람도 없고, 내 잘못이라고 나설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일상을, 나를 벗어나고 싶었다. ‘19호실로 가다’의 주인공 수전도 같은 마음이었다. 수전은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집에서 남편과 네 아이와 함께 산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일상에서 수전은 자주 공허를 느낀다. 그것은 악마와 죽음의 얼굴을 하고 불쑥불쑥 수전 앞에 나타난다. 겁에 질린 수전은 온갖 일에 몰두하며 바쁘게 지내지만, 마침내 인정한다. “12년 동안 나는 단 한 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 나만의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까 이제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해.”

수전은 일주일에 5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낡은 호텔 19호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가 있는 방에서 그녀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다만 ‘엄마’, ‘아내’, 그 외 모든 역할과 과거와 미래를 다 잊은 채 익명으로 존재한다. 안락의자에 앉아 기지개 켜고, 다양한 표정을 짓고, 하늘을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나는 수전에게서 나와 닮은 빈 곳을 더듬으며 혼자를 보냈다.

언제부턴가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이 늘었다. 몇 달 전, 오랜만에 만난 엄마 앞에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눈물 흘리자, 엄마는 휴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승은아, 잠시라도 좋으니 집을 나가보면 어때? 너 매일 글 쓰고 일하면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잖아. 너도 너만의 시간이 필요해.” 엄마는 오래전 적극적으로 혼자가 되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내가 열세 살 무렵,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엄마는 며칠 동안 집을 나갔다. 그때 엄마는 자기를 삼킨 역할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집에서 편하게 숨을 쉬기 어려웠다고 했다. 어느 봄, 무작정 짐을 챙겨 역 근처 허름한 여관에 갔다. 여관 주인은 혼자 온 엄마를 보고 출장 왔냐고 물었고, 엄마는 그렇다고 답했다. 집을 벗어난 2박3일 동안 엄마는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산책했다.

수전과 엄마와 나는 다른 시대와 다른 관계에 속해 있지만, 우리를 관통하는 공허는 닮아 있었다. 그 공허를 해결할 방법은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누구에게나 이 문장이 간절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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