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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추락하는 것에 날개를 달아주는 마음

등록 2021-10-08 04:59수정 2021-10-08 11:40

[한겨레Book]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l 웅진씽크빅(2008)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러브스토리로 읽든 강력한 신분 사회이자 가부장제 사회였던 19세기 영국에서 한 젊은 여성이 주체적 자아를 확립하는 이야기로 읽든, 서사가 통과하는 여러 곡절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인상을 촉발한 요소를 꼽으라면 단연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일 것이다. 인간의 언어조차 허락되지 못한 채 불길한 기척이나 소리, 폭력적 공격, 방화 등 ‘비정상적’ 행위로만 등장하는 버사 메이슨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라곤 자메이카의 크리올(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계 자손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유럽계와 현지인의 혼혈을 부르는 말로 확대되었다)이고, 원래 가계에 흐르던 광기가 강화되어 다락방에 감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정도다. <제인 에어>가 세상에 나온 지 백 년 만에 영국계 크리올의 딸이었던 작가 진 리스는 버사 메이슨을 제대로 조명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발표했다.

진 리스는 버사 메이슨의 진짜 이름을 되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영국의 식민지 자메이카에서 농장주 아버지와 크리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앙투아네트는 아버지의 죽음과 노예해방 이후 황폐해진 저택에서 가난과 수모를 견디며 살아간다. 주변 원주민들은 앙투아네트를 ‘흰 검둥이’나 ‘하얀 바퀴벌레’라고 부르며 멸시한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앙투아네트는 메이슨이라는 새 성을 부여받지만, 원주민의 폭동으로 유년의 집은 불타버리고 남동생도 목숨을 잃는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갇혔다가 끊임없는 성적 학대를 당하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혼자 남은 앙투아네트에겐 양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지만, 로체스터와의 결혼으로 그 재산마저 뺏기고 만다. (당시 영국법에 따라 결혼한 여성의 재산은 전부 남편 것이 되었다.) 순전히 앙투아네트의 재산을 보고 결혼한 로체스터는 ‘그런 처지에 빠진’ 자신을 연민하느라 정작 자신이 앙투아네트에게 가하는 폭력과 수탈의 본질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오히려 앙투아네트를 ‘길게 찢어진, 검은 동자의 눈. 서글픈 이방인의 눈. 그녀가 아무리 영국 순수 혈통의 크리올이라지만, 크리올을 영국 사람이나 유럽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라고 묘사하며 철저히 타자화한다. 앙투아네트를 ‘버사 메이슨’이라고 제멋대로 이름까지 바꿔 부르는 로체스터의 태도는 노예를 대하는 노예주나 식민지를 대하는 제국주의에 더 가깝다.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를 영국의 손필드 저택에 데려와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다락방에 가둔다. 그러나 앙투아네트의 시점으로 진술되는 짧은 ‘손필드’ 챕터에서 우리는 <제인 에어>의 짐승 같은 광녀가 아닌 자유를 갈망하는 한 여성의 최후를 목도한다. ‘바람이 내 머리에 닿으니 머리칼은 마치 날개처럼 물결치며 펄럭였다. 내가 만일 저 아래 단단한 돌바닥으로 뛰어내리면 내 머리칼이 날개가 되어 나를 둥둥 뜨게 하겠지.’ 백 년간 오해받아온 여성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예정된 추락 앞에서 찰나의 순간이나마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던 마음이야말로 진 리스가 이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가장 절실한 추동력이 아니었을까. 이주혜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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