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l 문학동네(2021) 아무리 다양한 혼혈이라도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보는 것이 ‘한 방울의 법칙’이다. 이런 극단적인 이분법을 통해 보면 ‘백인’과 ‘흑인’을 구별하는 기준은 피부색이 아니게 된다. ‘한 방울의 법칙’이 인종 정체성을 규정하는 세계에서는 피부색이 밝아서 누가 봐도 ‘백인’으로 보여도 그저 ‘흑인’이다. 이렇게 외모와 혈통의 모순이 만들어낸 현상이 ‘피부색이 밝은 흑인의 백인 행세’를 뜻하는 ‘패싱’이다. 흑인 의사와 결혼해 1920년대 미국 뉴욕 맨해튼 할렘의 중산층 삶에 안착한 아이린에게 어린 시절 친구 클레어가 나타난다. 언제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클레어는 아름다운 외모의 백인으로 패싱해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이자 흑인 혐오주의자인 남편과 살고 있다. 아이린은 클레어 부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 남편이 클레어를 ‘닉’(깜씨)이라고 부르는 걸 목격하고 경악한다. 클레어가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한 뒤에, 나에게 흑인의 피가 일이 퍼센트쯤 섞여 있다 한들 달라질 게 있어요?”라고 떠보자 남편 벨루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당신이 얼마든지 까매져도 상관이 없다고, 당신이 깜둥이가 아니라는 걸 내가 아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야. 우리 집안에 깜둥이는 안 돼.” 언제라도 남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 위험이 있는데도 클레어는 자꾸만 아이린의 흑인 공동체에 끼어들며 아이린의 삶마저 불안에 휩싸이게 한다. 지나치게 매력적인 클레어는 아이린의 주변인들을 매혹하고 결국 아이린의 남편 브라이언까지 흔들어놓는다. 남편의 마음을 의심하게 된 아이린은 클레어를 자신의 삶에서 몰아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그러나 클레어의 남편에게 클레어의 정체를 ‘고발’하려는 마음은 끝내 떨칠 수 없는 인종에 대한 공동체 의식과 연민 때문에 무너지고 만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거침없는 행동을 막아 내고 싶을 때 ‘모성’을 이용하기도 한다. 클레어가 임신 중에 피부색이 검은 아기가 태어날까 봐 공포에 휩싸였다고 고백한 바 있는 딸의 미래를 생각하라고, 지금껏 누려왔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넌지시 암시한다. 두 여성의 갈등과 불안에 인종과 젠더와 계급이 교차하는 대목이다. 타고난 계층과 인종을 고수함으로써 소수에 속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아이린은 그만큼 자신이 이룬 가족과 일상의 평화를 지키기를 열망한다. 이에 비해 클레어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백인 사회와 흑인 공동체 사이의 경계 지대를 표류하며 새로운 삶을 누리고자 욕망한다. 두 여성의 갈등은 ‘인종’과 ‘젠더’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한 인물의 내적 갈등으로 보이기도 한다. 긴장이 고조되다 결국 폭력적으로 폭발하고 마는 결말은 인종 문제가 흑인 여성들의 삶에 가하는 몇 겹의 불행을 참혹하게 그려낸다. 이토록 다른 듯 닮은 두 여성의 모습은 실제로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 모두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작가 넬라 라슨의 삶을 반영한 것이기도 한데, 작가는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이어야 하느냐고. 이주혜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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