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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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지음 l 창비(2021) 작업실 창 아래 화분에 심어놓았던 아레카야자가 말라버렸다. 최근에 분갈이했는데, 오히려 그때 뿌리가 상한 모양이다. 3년 반 전 이사 올 때 처음으로 야심 차게 들였던 식물이었는데 햇볕 잘 들지 않고 바람 잘 통하지 않는 집이라, 그리고 주인인 내가 게을러서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다. 세상엔 수많은 아레카야자가 있지만, 이 아레카야자는 세상에 딱 하나이고, 이것이 죽는다면 그 자체로 하나의 종말이다. 마음 아픈 일이다. 나인이라면 이 마른 식물을 살려낼 수 있을까. 나인은 선연산 남쪽 43번 국도 옆에 살며 태권도를 하는 중학생이다. 주변의 땅을 파랗게 빛나게 하는 능력이 있는 소녀이다. 다른 행성에서 온 식물이다. 천선란의 소설 <나인>의 주인공이다. <나인>은 외계인이 등장하는 에스에프(SF)이고, 실종된 소년의 진실을 찾는 미스터리이며, 소녀가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브로멜리아드 화원을 운영하는 이모와 함께 사는 나인, 어느 날 손가락 끝에서 새싹이 트고 식물의 목소리가 들린다. 모든 비밀을 함께 나누자고 했지만, 이제 친구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긴 나인에게 승택이라는 소년이 찾아온다. 그는 자신과 나인이 새싹으로 태어난 식물이며, 누브 행성에서 멸망을 피해 이주한 이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외계인이 아니라도 아이들은 반드시 변화를 겪는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미래와 현재도 이제 나인에게 말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나인의 학교에는 재작년에 실종된 소년, 원우가 있다. 나인은 이제 새롭게 생긴 능력을 통해서 원우의 행방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다른 소년, 도현을 목격한다. 중학생인 나인이 혼자 감당하기엔 어려운 사건이다. 외계인으로서 지구인 틈에서 살아가는 나인이 끼어들었다간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인은 모른 척할 수 없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죽은 소년은 단 한 명이었으니까. 그것도 하나의 멸종이었으니까. 아홉 개의 새싹 중 가장 늦게 핀 싹인 나인, 그 의미는 기적이다. 그 기적이란 우리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 <천 개의 파랑>에서처럼 <나인>에서도 계층을 넘어선 우정, 그리고 여럿이 힘을 모아 약자를 구하는 선의가 펼쳐지며 읽는 이의 마음이 푸른색으로 물들어간다. 작가는 <나인>에서 청소년이 겪는 잔혹한 현실을 성실히 묘사하되, 구조적인 악에 과감하게 맞서는 용기도 같이 그렸다. 천선란의 소설에는 상실을 자기 것처럼 함께 아파해주는 정다움이 있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이별이 온대도 다시 만날 날을 슬픔 없이 기다릴 수 있다. 책을 덮고 나인처럼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나인의 친구들 이름이 미래와 현재인 것은 이 소설을 이루는 큰 은유이다. 그처럼 주변의 산과 공기의 소리를 듣고 나무가 하는 말을 믿을 때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할 수 있다. 나인은 땅과 식물에서 기억을 얻고 다시 에너지를 주는 과정을 통해 상생을 깨닫는다. 지구는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나의 말라버린 야자나무에도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길 바라본다. 마지막 아홉 번째 새싹이 자라난 기적이 우리에게도 찾아오길 꿈꿔본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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