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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건조한 문장들 만큼이나 무심한 타인을 향한 시선

등록 2021-11-26 05:00수정 2021-11-26 11:36

[한겨레Book] 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단편 모음집 <엄마에 대하여> 중 최정나의 ‘놓친 여자’
가족 안위 위주로만 세상 보는 부부 눈에 비친 타인들

엄마에 대하여
최정나 외 5명 l 다산책방(2021) l 1만4000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채롭다. 누군가가 웬만한 집의 전세값에 해당하는 옷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동안, 누군가는 거처가 없어서 길바닥에서 밤잠을 청한다. 거리에 나서면 극과 극을 달리는 사람들을 몇 분 안에 동시에 볼 수 있다. 정색을 하고 보면 굉장히 이상한 일이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런 장면을 묵인하고 살아간다. 사회 구성원 중 일부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개선해보려 노력하고, 일부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무심히 살아간다. 요약하자면 ‘빈부격차’라 할 수 있을 이 문제에 후자의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건 ‘빈’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사정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후자처럼 생각한다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지금처럼 빈부격차 문제에 무심한 채로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의식주의 결핍에 시달린 이들에게서 기인한 다양한 문제들이 더 이상 내게만, 혹은 내 가족에게만 신경 쓰고 사는 삶을 영위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앤솔로지 <엄마에 대하여> 중 한 편인 최정나의 ‘놓친 여자’는 삶의 에너지가 온통 나와 내 가족의 안위에만 쏠려 있는 한 부부가 지나가는 몇 시간을 포착한 소설이다. 아들의 첫 데이트를 맞은 이 부부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아들과 여자친구가 들어간 레스토랑 인근의 식당에 포진해 아들의 데이트에 촉각을 기울인다. 급기야 식당 종업원을 통해 아들 커플에게 근사한 와인을 전달하기에 이르고, 아들이 데이트를 끝내면 차에 태워 데리고 돌아갈 계획을 세운다. 소설은 운전해온 차를 정차한 부부가 데이트 장소에 아들을 내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해 데이트를 끝내고 돌아온 아들을 태우기 직전에 끝난다.

두 시간 남짓에 지나지 않을 그 시간 동안 부부가 나누는 대화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카페 주변의 노인과 아이들, 과거 어느 시점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부부의 대화는 철저히 자신과 아들의 안위를 기준으로 전개된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대화는 일관되게 타인들에 대한 비난으로 흐르는데, 은근하지만 모멸감이 들어간 말들이 칼처럼 튀어나온다. 짧고 건조한 문장들에서 새어나오는 타인에 대한 경멸과 적대감에 독자는 불시에 가시에 찔린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불길한 암시로 끝난다. 부부가 들었던 쿵 소리는 부부의 인생을 바꿔놓을 큰 사건일 수도 있고, 하찮은 해프닝일 수도 있다. 만일 전자라면 이 부부는 오롯이 자신과 아들에게만 못 박혀 있던 시선을 돌려 좀 더 많은 타인들을 삶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될까.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연상시켰던 전작 ‘한밤중의 손님들’에서도 그랬듯, 작가는 이 소설에서도 대사와 행동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설명이 거의 없는 이 짧고 건조한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보내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은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보여주는 소설, 한 편의 그림을 본 듯한 소설, 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강렬한 작품이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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