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을 만난 세계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정창조·강혜민·최예륜·홍은전·김윤영·박희정·홍세미 지음, 비마이너 기획 l 오월의봄 l 1만8000원
1984년 9월19일이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고 4년 전 교통사고까지 당한 김순석(1952~1984)은 이날 오전 10시께 서울 마천2동 지하 셋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을 경찰은 ‘음독자살’로 결론지었다. 9월22일치 <조선일보> 11면에 그의 유서가 실렸다.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항거였다.
1995년 최정환 열사의 분신자살 이후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씨 분신사건 비상대책위’ 소속 회원과 대학생 300여명이 서초구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이들은 밧줄로 서로의 목을 감고 ‘폭력단속반 해체’와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최정환씨가 남긴 유언은 이후 장애해방 투쟁의 중대한 불씨 역할을 하게 된다. 사진 고 김종수 기자
1995년 3월21일이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오른쪽 다리를 잃은 최정환(1958~1995)은 1995년 3월8일 밤 9시30분 서울 서초구청 앞마당에서 몸에 불을 붙였고 병원에 실려 가 21일 새벽 1시50분께 사망했다. 노점에서 음악 카세트테이프를 팔며 살아가던 그는 구청 단속으로 몸을 다치고 스피커와 손수레를 빼앗겼다. 1991년 3월 용산구 장춘식(당시 41), 92년 2월 경기 성남시 이용재(34), 5월 인천 김창용(35) 등 노점상들은 줄줄이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했다. 92년 7월 강동구에 사는 지체장애인 박승학(56)도 뻥튀기 장사를 하다 단속을 당해 ‘생활고를 비관하여’ 목숨을 끊었다. 최정환은 죽어가며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1995년 최정환 열사의 분신자살 이후 전국노점상연합회 소속 노점상 1800여명이 서울 종묘공원에서 ‘살인단속 분쇄 및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사건 규탄대회’를 가진 뒤 평화행진을 위해 거리로 진출하려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에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95년 11월28일이었다. 소아마비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1967~1995)이 의문사했다. 인천 아암도 노점 철거에 맞서 망루 투쟁을 벌이다 탈출을 시도한 이덕인은 사흘 뒤 밧줄에 손목이 묶인 주검으로 발견됐다. 최정환의 시신을 빼앗은 경찰은 그의 주검도 영안실 벽을 뚫고 난입해 탈취했다. 부검 결과인 ‘익사’는 그의 죽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정권이 다섯번 바뀌도록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다. 이덕인이 쓴 일기의 한 대목은 이렇게 끝난다. “(…)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까…….”
2001년 7월23일이었다. 집 대문이 열렸을 때 1급 장애인 박흥수(1958~2001)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최정환의 죽음이 그가 ‘변방’에서 벌여온 장애인 투쟁의 결정적 전환점이 됐으나 그는 이덕인의 죽음 앞에 절망했다. 전력으로 운동에 투신해온 그를 집어삼킨 건 병마였다. 2002년 3월3일이었다. 박흥수와 더불어, 현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와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을 맡고 있는 박경석(61)과 함께, 1989년 서울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과정 동문회 ‘싹틈’ 출신 ‘3인방’으로 꼽히는 정태수(1967~2002)는 장애인청년학교 수료식 도중 심장마비로 숨졌다. 정태수는 장애인 인권 운동에서 변방의 힘을 세계로 확장하고 조직하는 데 온몸을 바쳤다.
2002년 3월26일이었다. 닷새 전 새벽 음독한 최옥란(1966~2002)이 끝내 숨을 거뒀다. 뇌성마비연구회 ‘바롬’ 창립에 함께한 그는 93년 결혼 뒤 이혼했고 아들 양육권을 얻지 못했다. 단속에 맞서 청계천에서 노점을 하며 아들을 위해 돈을 모아야 했다. 그러나 2000년 10월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턱없이 낮은 최저생계비를 책정하며 기초생활수급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마저 노점상은 수급권을 박탈당했다. 최옥란이 남긴 유서는 1년 전 작성된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께 (…) 현재 시행하고 있는 법이 나의 작은 꿈들을 다 잃게 했습니다. (…) 여러분에게 부탁이 있읍니다. 네 이루어지지 안는 것들을 꼭 이어주십시요. (…) 준호야 사랑한다. 꼭 너하고 사려고 해는데. 준호야 준호야 네가 보고 싶군나.”
2002년 최옥란 열사가 남긴 유서. 빈곤사회연대·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제공
2006년 6월2일이었다. 중증장애인 박기연(1959~2006)의 전동휠체어는 인천행 열차가 들어오는 간석역 선로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갔다. 글도 모르고 말도 제대로 못 하던 박기연은 2000년대 들어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뛰어들었다. 몇 안 되는 매체는 1급 뇌병변 장애인의 비관 자살로 보도했다. 그가 바라던 활동지원서비스는 거론되지 않았다. 2011년 1월2일이었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 우동민(1968~2011)은 2010년 12월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이 엉터리 장애인활동지원법을 날치기 통과시키자 한파 속에 기자회견과 시위를 이어가다 급성폐렴으로 숨졌다. 직전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농성 때 난방과 식사반입이 중단된 가운데 우동민은 폐렴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갔었다. 이때 그가 남긴 한마디 말이 유언으로 남았다.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
<유언을 만난 세계>에 기록된 열사들의 죽음 이후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이들을 비롯한 장애해방열사 44명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장애인의 이동권·노동권·생존권·인권은 충분히 보장되고 있을까.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막는다며 예고 없이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폐쇄하는 서울교통공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장애인을 태우지 않는 버스 운행을 막기 위해 누군가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야 하는 2021년 오늘, 장애인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이 누려 마땅한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가.
다만 확실한 것은, 장애해방열사들의 투쟁이 오늘날 장애인 운동의 주춧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적 장애인언론 <비마이너>가 기획하고 기록 활동가 7명이 써내려간 장애해방 분투의 역사 <유언을 만난 세계>가 바로 그 징표이다. 오늘도 장애와 함께 살아가며 장애해방을 위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싸워나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의무가 누구에게나 있다. 편견에 맞서 차별과 싸우는 일상과 숙명은 장애인만의 것이 아니다. 이들은 비장애인보다 먼저 겪고 있는 것일 뿐이니, 이들의 투쟁은 곧 우리 모두의 투쟁이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