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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도스토옙스키의 꿈

등록 2021-12-17 05:00수정 2021-12-17 19:32

[한겨레Book] 이권우의 인문산책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l 민음사(2012)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 도서관에서 <죄와 벌> 함께 읽기를 진행했다. 고등학생 시절 세로쓰기 판본으로 읽어낸 다음 몇 번째 읽었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인정하듯 고전이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지라 늘 지적 갈증을 가시게 해준다. 이번에도 역시 어떤 전율을 느끼며 읽었다. 책을 즐겨 읽는 시민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면서 새롭게 깨달은 게 많았다.

다시 읽으며 내가 주목한 대목은 꿈 이야기다. 작가가 말했듯 “병적인 상태에서 꾸는 꿈은 이례적일 만큼 입체적이고 선명하며 또 현실과 굉장히 유사”한 법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아버지와 교외를 산책하다 큰 술집을 지나면서 잔인한 장면을 목격한다. 작고 비썩 마른 적갈색 농사용 암말에 커다란 짐마차를 연결해 놓았다. 보기만 해도 힘겨워하는 암말을 무시하고 짐칸에 사람을 가득 태운다. 그러고는 달리라며 채찍질을 한다. 뜻대로 되지 않자 미쳐 날뛰듯 채찍질해 마침내 말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이 대목은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 여주인을 살해하는 장면을 예고한다. 암말은 여러모로 “멍청하고 무의하고 하찮고 못됐고 병든 노파”를 떠올리게 한다. 잔인하게 채찍질하는 말 주인은 “비범한 사람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온갖 방식으로 법률을 뛰어넘을 권리가 있”다는 주인공의 신념과 일치한다.

두 번째로 주목한 대목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꿈이다. 이 인물은 라스콜니코프의 이란성 쌍생아라 할 법하다. “빈곤과 누더기와 죽음과 절망이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는 극단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해나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오로지 이기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충족하며 사는 삶이다. 가정교사를 희롱하고 열네살 소녀를 능욕했고 하인한테 잔인했으며 부인마저 살해했다. 도박, 돈, 섹스가 전부였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역시 “어떤 장애물을 뛰어넘을 권리”가 있는 양 살아온 셈이다. 그가 꾼 꿈의 앞대목은 <죄와 벌>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물론 한낱 악몽으로 전환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꿈을 꾸기 전 그는 두네치카라면 자신을 어떻게든 개과천선시켰을 거라 혼잣말을 한다. 두네치카도 리자베타와 소냐처럼 유로지브이(성 바보)이다. 하나, 두네치카는 그의 사랑을 거부한다. 그가 자살한 이유가 뚜렷해진다.

소냐의 간곡한 호소와 예심판사 포르피리의 권고로 자수했지만,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다 꿈을 꾸고 회심한다.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감염된 사람은 자신만을 진리의 독점자로 여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진다는 내용이다. 이념의 극단적 추구가 가져올 허망한 세계를 상상적으로 겪은 셈이다. 그때 비로소 보인 것이 소냐의 사랑이다. 소냐는 불쌍한 것들, 온순한 것들, 사랑스러운 것들의 상징이요, 울지 않고 신음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내주는 삶이다. 이 삶을 받아들이자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하게 된다.

오늘 인류는 아포칼립스적 상황을 맞이했다. 어떤 삶이 우리를 구원할까? 극단적 이기주의도, 극단적 이념도 아니라고 도스토옙스키는 말한다. 예수의 삶에 비견되는, 죄 없으나 죄를 온통 뒤집어쓰고 그 고행의 길을 담담히 걷는 소냐의 삶만이 마침내 우리를 구원해주리라 귀띔해준다. 과연 나는, 혹은 당신은 이 삶을 살 수 있을까? 내가 인류의 미래에 절망하는 이유다.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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