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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토록 난폭한 ‘페미니스트 스웨그’

등록 2021-12-24 04:59수정 2021-12-24 19:18

19~21세기 페미니즘 선언 75편
폭발하고 저항하는 언어 한자리에
퀴어·반자본·계급·피부색 망라
한국의 여성주의 선언문도 포함

우리는 다 태워버릴 것이다
페미니즘 매니페스토, 폭발적으로 저항하는 언어들
브리앤 파스 엮음, 양효실·이라영·이진실·한우리·황미요조 옮김 l 바다출판사 l 3만8000원

“나는 에이즈 보균자가 대통령이 되길 원하고 호모가 부통령이 되길 원한다. (…) 열여섯 살에 낙태를 해본 대통령을 원하고, 최악 대신 어쩔 수 없이 남은 차악이 대통령이 되지 않길 원한다.”(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 1992)

지금 행복한 사람들은 이 선언문을 읽을 수 없다.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75편의 타오르는 페미니즘 선언문들이 머리를 어지럽힐 테니까. 주인에게 빌붙어 노예의 교양과 온화함을 얻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이라면 경건한 신의 말씀과, 권력이 주조한 세계의 법칙만 평생 읽어도 충분하다. <우리는 다 태워버릴 것이다>라며 거칠게 몰아붙이는 이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독자는 따로 있다.
조이 레너드, ‘나는 대통령을 원한다’(1992), 종이에 타자기로 친 텍스트. 바다출판사 제공
조이 레너드, ‘나는 대통령을 원한다’(1992), 종이에 타자기로 친 텍스트. 바다출판사 제공

지금 억울하고 불만스럽고 화가 들끓는 사람은 이 선언문을 소리쳐 읽으면 좋다. 퀴어/트랜스, 반자본주의/무정부주의, 분노/폭력, 선주민/유색인 여성, 성/신체, 해커/사이보그 등 8개의 주제 안에 세계의 모순을 밝히고 투쟁을 선포하는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이 풀릴지도 모르니까. 성별·피부색·돈·혈통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 분노해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특히 이 선언문은 ‘사이다’가 될 것이다.

젠더 폐지, 결혼 폐지, 국경 폐지, 화폐 폐지, 자유주의 폐지의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1960년대 래디컬 페미니스트 티그레이스 앳킨슨은 “결혼과 가족은 과거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부패한 제도”라며 “사랑을 끝내자”고 선동한다. 무정부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앤디 워홀에게 총을 쏜 ‘암살자’ 밸러리 솔라나스의 선언문은 가장 폭력적인 것으로 꼽힌다. “여성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정부를 전복시키고, 금융제도를 파괴하고, 제도를 자동화하고, 남성을 없애버리는 것이다.”(스컴 선언문, 1967)

<우리는 다 태워버릴 것이다>에는 수많은 정체성의 정치가 소란스럽게 난무한다. 여성적인 행동에 대한 편견을 반대하는 ‘이페미니스트 남성’들과, 스스로 어떤 종류의 페미니스트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친-여성’(pro-woman) 레즈비언들은 성별이분법의 한계를 고발한다. 기존 젠더 체계를 폐지하기 위해 기술 사용을 추구하는 ‘제노페미니즘’ 운동가들은 ‘본질적 자연주의’에서 고약한 악취를 맡는다. ‘깨시민-대안’(AltWoke) 선언문은 중도 리버럴 또는 래디컬 좌파 ‘깨시민’(woke)이 기회주의적이고 손쉬운 정체성 정치를 한다고 비판한다. “퀴어, 괴물, 야생동물, 사이보그, 히스테리 환자” 같은 “다른 몸”을 지지하는 이들, “우리는 점액질 용병”이라는 ‘사이버 페미니스트’… 이들은 과격한 소수자로서 자기 존재를 선포한다.

책의 중심엔 1960~70년대 미국 인권운동 영향으로 속도가 붙은 페미니즘 운동의 갈등이 존재한다. 1980년대 임신·출산의 선택권을 주장한 페미니스트들은 레즈비언들을 축출했다. “폭력적인 쌍년들”이라 자처하는 이들은 아빠와 조상을 존경하는 ‘대디 걸’을 물어뜯는다. 남자에 영합하며 비위 맞추는 여자를 저격하면서 솔라나스는 말한다. “경멸은 이 시대의 현상이다.” 흑인 페미니스트 작가는 백인성을 비판하고 캐나다 선주민 작가는 젠더 폭력 종식을 위해 ‘정착민 식민주의’를 부수자고 촉구한다.

페미니즘 대중화에 힘입어 페미니스트 선언문 묶음이 이미 여럿 나왔지만, 분량과 종합적인 면모로는 이 책이 단연 압도적이다. 소저너 트루스의 ‘나는 어떤 남자만큼이나 강합니다’(1851), 게이해방전선 선언문(1971), 실비아 페데리치의 가사노동 반대 선언문(1974), 레드스타킹스 선언문(1969), ‘교차성 이론’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컴바히강 집단 선언문(1977), 사파티스타 여성 혁명법(1994), 트래시 걸즈 선언문(2016), 전통적인 여성상 매장을 위한 장례식 연설(1968) 등 다채롭고도 전설적인 텍스트가 900쪽 가까운 이 한 권에 가득하다.
미나 로이, ‘페미니스트 선언문’(1914). 종이에 휘갈겨 쓴 메모 같은 선언문이다. 바다출판사 제공
미나 로이, ‘페미니스트 선언문’(1914). 종이에 휘갈겨 쓴 메모 같은 선언문이다. 바다출판사 제공

여성주의와 예술을 전공한 옮긴이들(양효실·이라영·이진실·한우리·황미요조)이 나눠 작업을 맡았고, 필기체로 휘갈겨 알아보기 힘든 원문까지 일일이 발굴하듯 대조하는 끈질긴 노력 끝에 완성된 번역서다. 1898년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인 ‘여권통문’부터 최근의 에코페미니스트 선언문까지 부록으로 담은 이 선집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레퍼런스가 된다.
김소사, 이소사의 ‘여권통문’(1898). &lt;황성신문&gt;에 수록된 것이다. 바다출판사 제공
김소사, 이소사의 ‘여권통문’(1898). <황성신문>에 수록된 것이다. 바다출판사 제공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선언문은 애초에 술렁거림과 큰 감정적 폭발을 염두에 두는 창작물로서 불친절하고 혼란스러운 장르다. 더욱이 과시와 전시의 시대에 이르러 선언문 속 저항은 기업이 주도하는 취향팔이의 도구가 되었다고 엮은이는 분석한다. 그에 견줘, 수없이 성기를 말하면서 외설적이고 부적절한 단어만을 골라 사용하는 페미니스트 선언문은 예쁘긴커녕 난폭한 데다 무례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만큼 시대정신인 ‘스웨그’가 뿜어져 나오는 것도 사실. “계급에 기반한 분노의 장르”로서 페미니스트 선언문은 “남자들이 이 세계에서 만들어낸 쓰레기통”(솔라나스)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개인의 ‘야망’과 ‘야욕’을 구분할 수 없는 이들이 이 책을 오독하고 엉뚱한 용기를 얻어갈까 우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의’가 언제 개인의 욕심에 이용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이 책을 읽고 당신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나는 좆도 관심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하고 싶다. (…) 이번만은 네 똥은 네가 치우길.”(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페미니스트 선언문, 2017) “만국의 비만인들이여 단결하라! 당신들은 뺄 것이 아무것도 없다.”(비만 해방 선언문, 1973) 웅장함 속에서 깨알 같은 위트를 발견할 때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실망스러운 시대에 커다란 위로가 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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