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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인의 날것 원고를 편집한 ‘원로 평론가’의 한국 현대시 여행

등록 2022-01-07 05:00수정 2022-01-07 14:31

염무웅 문학사론저 ‘한국 현대시’…최남선부터 김남주까지 망라

한국 현대시
그 문학사적 맥락을 찾아서
염무웅 지음 l 사무사책방 l 2만5000원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한국 현대시>는 체계적인 시사(詩史)를 표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요 시인과 작품을 설명함으로써 느슨하게나마 한국 현대시의 역사적 줄기를 꿰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책에 실린 글은 대부분 기존 평론집에 수록되었던 것들이고, 발표 연도도 1969년에서 2021년까지 무려 반세기 남짓에 걸쳐 있다. 그럼에도 지은이 나름의 일관된 시각과 문제의식이 탄탄하고,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문단사적 서술이 흥미를 돋운다.

흔히 한국 근대시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이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이고, 이 작품이 발표된 1908년을 한국 현대문학의 기점으로 삼고는 한다. 그러나 이런 통설에 염무웅은 동의하지 않는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출현이 근대시의 탄생을 예고하는 징후적 사건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자체가 근대시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성을 획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1920년대 중반에 나온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과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등이 진정한 근대시의 출발이라고 그는 보는데, “‘해에게서 소년에게’ 같은 어설픈 모방시로부터 ‘진달래꽃’, ‘님의 침묵’ 같은 무르익은 자유시에 이르는 도상에서 한국시의 내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지은이는 쓴다.

이들에 이어 정지용·백석·이용악 등 1930년대 시인들을 비롯해 1940~50년대 주요 시인들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건너뛰고 책은 1960년대 시의 양대 흐름이라 할 전통주의와 현대주의(모더니즘)를 대표하는 서정주와 송욱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간다. 일제강점기였던 1941년에 출간된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에 관해 지은이는 한계와 문제점이 없지 않지만 “식민지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을 함축하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귀촉도>(1948)와 <서정주시선>(1956)의 “반역사적·비사회적 발전”을 거쳐 <신라초>(1961)와 <동천>(1968) 같은 60년대 시집에 오면 “서정주는 마침내 오만한 전통주의자로 변신”했다는 것이 염무웅의 판단이다.

그렇다면 서정주의 대극이라 할 송욱은 어떨까. 모더니스트 송욱의 이른바 ‘언어실험’에 대한 지은이의 비판은 서정주에 견주어서도 훨씬 더 신랄하다. “비상식적 언어 날조” “변명의 여지 없는 속임수” “무책임한 야유와 내용 없는 말장난과 페단티즘(현학)의 악취를 풍기는 어휘들의 홍수”처럼 사뭇 감정적인 표현들은 이 글이 발표된 1969년에 염무웅이 이십 대 열혈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려주는 듯도 하다.

주요 시인과 작품을 통해 한국 시문학사의 맥락을 구축하고자 한 문학사론저 &lt;한국 현대시&gt;를 낸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 “시론이나 시인론에 가까운 글을 쓸 때마다 내가 다루는 대상이 우리 현대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가를 의식해왔다”고 ‘책머리에’에 썼다. <br>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주요 시인과 작품을 통해 한국 시문학사의 맥락을 구축하고자 한 문학사론저 <한국 현대시>를 낸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 “시론이나 시인론에 가까운 글을 쓸 때마다 내가 다루는 대상이 우리 현대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가를 의식해왔다”고 ‘책머리에’에 썼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러나 문학과 삶, 문학과 현실의 긴밀한 관계를 중시하는 현실주의 비평가로서 그가 모더니즘에 대해 지니는 근본적 불신과 회의가 송욱 시에 대한 박한 평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 책에는 김수영에 관한 글이 두 편 들어 있다. “젊은 날의 내 우상이었던”(‘책머리에’) 김수영에 관한 그의 애정을 알게 하거니와, 1976년작인 ‘김수영론’에서 그가 김수영의 삶과 문학을 애정 어린 어조로 살펴본 끝에 “김수영은 끝까지 난해시의 영역, 즉 모더니즘의 한계 속에 남아 있었다”거나 “그는 모더니즘을 청산하고 민중시학을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며 아쉬움을 표하는 데에서도 모더니즘 자체에 대한 염무웅의 거리감을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지난해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기조발제로 발표한 글 ‘김수영이 수행한 문학사의 전환’에서 김수영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적지않은 변화가 보인다. “김수영에게서 현실과의 대결이라는 리얼리즘적 정신을 보지 않는다면 그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김수영은 누구보다 치열한 리얼리스트였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모더니스트이자 리얼리스트로 김수영을 재평가하는 것.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반드시 적대적이며 모순적인 개념으로만 볼 일은 아닐 테고, 양자의 회통을 주장하는 논의가 나온 것도 벌써 오래전이다. 염무웅이 보기에 김수영이 그 둘을 넘어서면서 일치시키는 비결은 ‘자기 자신-되기’에 있다. “김수영은 철저한 리얼리스트이자 탁월한 모더니스트이지만, 동시에 그 모두이기도 하고 또 그 모두를 넘어선 존재, 즉 가장 깊은 뜻에서 자기 자신에 도달한 시인이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염무웅은 1964년에 등단해 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신구문화사와 창작과비평 같은 출판사의 편집자로도 두툼한 경력을 쌓았다. 이런 이력 덕분에 그의 평론에는 자신이 직접 겪거나 목격한 일화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다. 가령 그는 첫 직장이었던 신구문화사에서 편집고문 신동문과 함께 <현대한국문학전집>을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시인이 아닌 평론가 천상병의 해설 원고를 여러 편 받아 실었다. <창작과비평> 편집장으로 일하던 1970년에는 등단 뒤 10년 가까이 침묵하던 신경림의 오랜만의 신작 ‘눈길’ ‘그날’ ‘파장’ 등을 역시 신동문을 통해 전달받아 잡지에 실었다. 이 일을 두고 염무웅은 “새로운 시세계가 내 시야에 출현하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의 충격과 흥분”이자 “잡지 편집자로서 잊을 수 없는 행운이고 기쁨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보다 앞서 1968년에 김수영 유고작을 잡지에 싣는 과정에서는 ‘“김일성 만세”’를 제외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책 말미의 후배 평론가 김수이의 ‘해설’을 통해 소개되기도 한다.

김수이의 해설은 원래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발행하는 <현대비평> 2021년 봄호에 실렸던 것인데,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문단과 사회현실의 정황 및 작가의 삶을 생생하게 스케치하는 염무웅 비평의 특징과 강점”이라는 대목은 이 책 <한국 현대시> 전체를 요약하는 표현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문학사론저 &lt;한국 현대시&gt;를 낸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문학사론저 <한국 현대시>를 낸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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