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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씩씩한 서정, 동사의 시학

등록 2022-02-04 05:00수정 2022-02-04 10:09

등단 40년 이재무 신작시집
거침없고 활달한 시풍 속
슬픔과 분노의 뿔 곧추세워
열세 번째 신작 시집 <즐거운 소란>을 펴낸 이재무 시인. “앞으로는 시다운 시를 지양하고 형식에서 자유로운 시를 활달하게 쓰고 싶다”고 말했다. 천년의시작 제공
열세 번째 신작 시집 <즐거운 소란>을 펴낸 이재무 시인. “앞으로는 시다운 시를 지양하고 형식에서 자유로운 시를 활달하게 쓰고 싶다”고 말했다. 천년의시작 제공

즐거운 소란
이재무 지음 l 천년의시작 l 1만원

얌전하고 우아한 서정은 가라!

이재무 시집 <즐거운 소란>을 읽다 보면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재무의 시들은 분명 서정시의 계보에 속하지만, 그 서정은 우리가 아는 서정과는 다른 색깔을 지녔다. 자연과 일상을 즐겨 소재로 다루고 시인 자신의 감흥과 성찰을 표출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여느 서정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점잔 빼거나 고상한 체하는 태도와 거리를 두고 거침없으며 활달한 어조를 구사하는 그의 시는 대범하고 씩씩한 기상을 뿜어낸다.

“꽃한테 농이나 걸며 살면 어떤가// 움켜쥔 것 놓아야 새것 잡을 수 있지// 빈손이라야 건들건들 놀 수 있지// (…) // 경전 따위 율법 따위 침이나 뱉어 주고//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건들건들’ 부분)

인용한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불량스럽게 어깨를 까닥거리도록 만든다. 시 제목과 발음도 비슷한 건달의 포즈와 동작을 떠오르게도 한다. 그러나 이 태도와 행동의 주인이 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악행을 일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암팡지고 꾀바르게 사느라” “그늘 깊어진” 이들을 비웃으며, 매인 데 없이 자유롭고 즐겁게 살고자 할 따름이다. 가진 게 없기에 가능한 홀가분함, 거추장한 규율에 속박되지 않으려는 독립과 자존을 그는 구가한다.

‘건들건들’과 그 변형인 ‘간들간들’, ‘근들근들’이 시의 주제에 맞춤하게 어울림은 물론이다. 이 시뿐만 아니라 시집 속의 여러 작품들에서 이재무는 같은 말을 중첩시키는 반복합성어를 적극적으로 구사한다.

“낮에는 햇볕이 찰랑찰랑 쌓이고/ 밤에는 달빛이 글썽글썽 고이는/ 울타리 밖 바람도 유순해져/ 가만가만 부는 집, 내가 떠나온/ 머나먼 옛집”(‘옛집’ 부분)

‘찰랑찰랑’과 ‘글썽글썽’, ‘가만가만’이 각각 햇볕과 달빛과 바람의 속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보라. 시인의 기억 속 옛집에서 자연과 인간은 긴밀하게 조응했고, 첩어는 그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을 함축적으로 갈무리해 오늘에 전달한다. 독자는 시집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아도 소곤소곤, 슬금슬금, 겅중겅중, 들썩들썩, 뚝딱뚝딱, 뽀송뽀송 같은 말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같은 말을 겹쳐 쓰는 데에서 빚어지는 리듬감은 시의 가독성을 높이고 활기와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동사에 대한 시인의 편애가 그런 활기 및 생동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명사에는 진실이 없다/ 진실은 동사로 이루어진다/ 신이나 진리를 명사로 가두지 마라”(‘동사를 위하여’ 전문)

명사는 고정된 것 또는 경전이나 규율과 관련되는 반면, 동사는 탈주와 자유로 이어진다. ‘나는 여름이 좋다’라는 시에서 이재무는 “여름은 동사의 계절/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라며 여름이라는 계절의 역동성을 예찬한다. 그런데 같은 시에서 그는 여름을 좋아하는 다른 까닭 역시 밝힌다.

“나는 시끄러운 여름이 좋다/ 여름은 소음의 어머니/ 우후죽순 태어나는 소음의 천국/ 소음은 사물들의 모국어”

여름은 동사의 계절이기도 하고 소음의 계절이기도 하다. 아니 동사와 소음은 실은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형들이다. 소음이란 중구난방으로 들끓는 소리, 다시 말해 움직이는 소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물들이 소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생각은 ‘소리의 내력’이라는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 시에 따르면 “만물은 저마다의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소리는 감추지 않고 속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리야말로 사물의 실체”에 해당한다.

꼬리와 뿔이라는,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신체 구조가 제 몸에 생겼다는 고백을 담은 시 두 편이 이와 관련해서 흥미롭다. ‘커밍아웃’이라는 시의 화자는 어느 날 제 궁둥이에 꼬리가 생긴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꼬리를 말아 감추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데, 아무래도 꼬리가 생기기 전보다는 “언행에 주의가 따랐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중 그는 문득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저들도 꼬리를 몰래 감추고 사는 것은 아닐까?” 의심은 이내 확신으로 바뀐다. “유난히 점잔을 피우는 자일수록 꼬리가 긴 사람이다.” 이재무가 고상한 서정시를 마다하고 ‘건들건들’의 세계관을 좇는 까닭을 여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달려라, 뿔!’이라는 시에서는 화자의 이마에 돌연 뿔이 돋아난다. 염소나 황소도 아닌 터에 이마에 뿔이 돋는 사태 앞에서 화자는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들이박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 신께서 내게 뿔을 주셨다. 달려라, 뿔!”
열세 번째 신작 시집 &lt;즐거운 소란&gt;을 낸 이재무 시인. “나이가 들다 보니 새록새록 옛날 생각이 나서 고향을 다룬 시를 자주 쓰게 된다”고 말했다. 천년의시작 제공
열세 번째 신작 시집 <즐거운 소란>을 낸 이재무 시인. “나이가 들다 보니 새록새록 옛날 생각이 나서 고향을 다룬 시를 자주 쓰게 된다”고 말했다. 천년의시작 제공

이재무는 에스엔에스 활동을 열심히 하는 편이다. 에스엔에스 공간은 그의 일상을 소개하고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창구이자 습작품을 공개하는 1차 발표 지면의 역할도 한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의 40퍼센트 가까이가 에스엔에스에 먼저 올렸던 것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정치적 견해를 담은 그의 에스엔에스 글들은 때로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열정적인데, 그것이 슬픔과 분노에 유난히 취약한 그의 성정 때문임을 ‘나는’이라는 작품이 알게 한다.

“눈물과 분노에 쉽게 전염되는 사람/ 누군가 울고 있으면 내 몸은 벌써/ 습지처럼 촉촉하게 젖어 오고/ 누군가 의분으로 떨쳐 일어서면/ 내 몸은 이미 주먹으로 단단해져 있다/ 나는 눈물과 분노 바이러스에/ 항체가 없어,/ 매일을 속수무책 울며 소리치는 사람”(‘나는’ 전문)

1983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해 올해로 40년째를 맞은 이 60대 중반의 시인은 “이순 너머의 귀가 순해지지 않고 자꾸만 역해져 간다”(‘이순 너머의 귀’)며 고민하는데, 독자로서는 그의 여전한 혈기와 패기가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다. “혼란과 파괴는 창조와 건설의 어머니/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을 정화시킨다”(‘어떤 시인들’)고 그도 쓰지 않았겠는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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