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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공화주의에서 ‘경제적 종속’ 끊어낼 길을 찾다

등록 2022-02-18 05:00수정 2022-02-18 10:09

[한겨레BOOK]
미국 정치학자 알렉스 고레비치
미국노동운동사 속 공화주의 전통
스스로 통제하고 형성하는 노동자
사회 전체의 변혁 위한 밑그림 찾아
1882년 9월5일 미국 뉴욕시 유니언 광장에서 노동기사단이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는 첫 집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오늘날 미국 ‘노동자의 날’의 기원이 됐다. 잡지 ‘프랭크 레슬리의 주간 그림 신문’에 실렸던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1882년 9월5일 미국 뉴욕시 유니언 광장에서 노동기사단이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는 첫 집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오늘날 미국 ‘노동자의 날’의 기원이 됐다. 잡지 ‘프랭크 레슬리의 주간 그림 신문’에 실렸던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19세기 노동기사단과 공화적 자유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가?
알렉스 고레비치 지음, 신은종 옮김 l 지식노마드 l 2만3000원

‘우리 모두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라는 원칙은 주로 공화주의 이념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 그런가? 흔히 정치적 영역이라고 하는 무대의 뒤편인 경제적 영역으로 눈을 돌려보면, 우리는 절대다수의 대중이 임금노동 계약에 붙들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형성할 수 없는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목도한다. 안전한 작업장에서 노동할 권리, 자기만의 정치적 견해나 성적 지향을 가질 권리 등 노동자에게 보장됐다는 자유와 평등은 고용주가 휘두르는 자의적인 힘에 구조적인 영향을 받는다.

흔히 이 문제를 논의하는 데에는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동원되지만, 우리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공화주의로부터도 이런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사상적 자원을 찾아낼 수 있다. 정치학자 알렉스 고레비치 미국 브라운대 교수는 2015년 펴낸 저작 <19세기 노동기사단과 공화적 자유>에서 공화주의 사상의 계보에 기대어 ‘우리 시대의 노동은 자유로운가’ 묻는다. 공화주의 사상을 새롭게 읽어내기 위해 지은이가 주목하는 것은 19세기 미국에서 최초로 전국 단위 노동운동을 일으켰던 ‘노동기사단’의 존재와 그들이 형성했던 사상, ‘노동공화주의’다.

퀜틴 스키너, 필립 페팃 등 이른바 ‘신공화주의’ 이론가들은 자유를 ‘간섭의 부재’(불간섭) 상태로 보는 자유주의적 관점과 달리 ‘자의적 지배의 부재’(비지배)로 보는 등 공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주도한 바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들의 분석이 초기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 이후의 현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을 해내지 못하며, 자본주의 사회가 자신을 재생산하는 제도적 동력으로서 ‘경제적 종속성’을 천착하지 못해 ‘공화적 자유’ 개념을 자유주의자들이 선점하게 놔뒀다고 비판한다. “공화적 자유란 근대 산업자본주의 경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핵심 질문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공화주의가 근본적으로 “노예제와 자유의 패러독스”를 안고 있다고 본다. 고대 아테네나 로마에서 모든 시민은 타인에게 예속되지 않을 ‘독립’을 보편적인 가치로 삼았는데, 이는 ‘종속적인 노예’의 존재가 있기에 가능했다. ‘균형 잡힌 사회질서’ 등을 앞세워 봉합되어 있던 이 딜레마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선언하는 근대에 들어 역설로까지 발전했다. “만약 기원상 시민의 독립성이 노예인 타인을 전제하고 있기에 노예제의 반대 개념이라면, 정치적 이상을 인간의 평등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현대에서는 시민의 독립성은 그 자체가 역설적인 것이 된다.” 공화주의를 앞세운 미국에서는 건국 뒤 노예제를 두고 이 역설이 문제로 불거졌고,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임금노동’에 대한 다기한 태도들이 같은 역설을 반복하도록 만들었다. 주류가 되었던 태도는 임금노동을 자발적 계약 아래 노동할 수 있는 ‘자유노동’이라 보고, 이를 독립성을 담보해주는 ‘자기 지배(결정)’로서 공화적 자유와 연결시키는 ‘자유방임적 공화주의’다. “노동을 자산-소유권의 한 형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중요한 개념의 이동이며, 자유노동과 영구적 임금노동이라는 조건을 일치시키는 공화주의를 낳는다.”

1886년 열린 노동기사단 집회에서 흑인으로서 버지니아 지방의회의 대의원이 된 프랭크 패럴이 노동기사단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테런스 파우덜리를 소개하고 있는 모습. 노동기사단은 남북전쟁 뒤 최초의 전국 단위 노동조합으로, 미숙련 노동자는 물론 흑인, 여성 등 거의 모든 노동자에게 가입을 허용한 개방적 조직이었다. 잡지 ‘프랭크 레슬리의 주간 그림 신문’에 실렸던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1886년 열린 노동기사단 집회에서 흑인으로서 버지니아 지방의회의 대의원이 된 프랭크 패럴이 노동기사단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테런스 파우덜리를 소개하고 있는 모습. 노동기사단은 남북전쟁 뒤 최초의 전국 단위 노동조합으로, 미숙련 노동자는 물론 흑인, 여성 등 거의 모든 노동자에게 가입을 허용한 개방적 조직이었다. 잡지 ‘프랭크 레슬리의 주간 그림 신문’에 실렸던 그림.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러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임금노동을 자유노동으로 보는 입장을 철저히 부정하는 흐름이 일었고, 이는 노동기사단이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노동공화주의적 기획에 초석을 놓았다. 1869년 전국 단위 노총과 노동자 정당을 조직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무산된 뒤 의류 산업 노동자들로 구성된 소규모 단체가 노동기사단이라는 비밀결사체를 조직했고, 나중에 공개적인 대중조직으로 전환된 노동기사단은 1886년 비공식 조합원까지 합쳐 100만명이 가입할 정도로 영향력을 키웠다. 그러나 1880년대 말부터 내부 분열과 외부 탄압으로 급속히 쇠락해 결국 미국노동총연맹(AFL)에 밀려났다. 흔히 노동기사단은 “보수적인 미국노동운동사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낭만적 유토피아 운동의 하나 정도로 인식”되곤 하지만, 지은이는 이들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심화된 공화주의적 비전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lt;19세기 노동기사단과 공화적 자유&gt;를 쓴 미국 정치학자 알렉스 고레비치. 정치학 분야의 권위 있는 학술저널 &lt;폴리티컬 시어리&gt;가 2020년 이 저작에 대한 지상 심포지엄을 여는 등 세계 정치학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누리집 갈무리
<19세기 노동기사단과 공화적 자유>를 쓴 미국 정치학자 알렉스 고레비치. 정치학 분야의 권위 있는 학술저널 <폴리티컬 시어리>가 2020년 이 저작에 대한 지상 심포지엄을 여는 등 세계 정치학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누리집 갈무리

노동기사단은 “지배가 노동계약에 앞서 선험적으로 존재하며 노동계약이 맺어지는 과정 자체에 이미 내재하고, 작업장 깊이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노동자가 계약을 맺어야 하는 ‘필연’에 구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력만을 따로 떼어서 팔 수 없기에 경제적 자립성을 결코 획득할 수 없는, ‘구조적 지배’를 인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임금노동 자체를 폐지하고 노동자가 스스로 작업장을 통제하는 ‘협동조합’ 체제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에게 노동자들이 서로 맺는 관계 속에서 자기 결정력을 도출해내는 ‘협력’ 원칙은 독립성, 자립성 또는 ‘비지배’를 구현할 수 있는, “공화주의적 딜레마를 해결할 가장 선진적인 해법”이었다. 또 협동조합은 사회 체제와 따로 떨어진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연합조직으로까지 확장시켜 “중앙집중적 모델”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자본주의 산업 시스템에 공화주의 원칙을 기입”하려 한 것이다. 지은이는 “자유를 부정당한 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기획이 “공화적 자유를 ‘방어적’ 자유에서 ‘공격적’ 자유로” 탈바꿈시켰다고도 평가한다.

책 말미에 지은이는 자신의 분석에 대해 독자들이 “장편의 마르크스주의적 복화술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지 모르겠다”고 썼다. 내용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노동공화주의 사이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은이는 노동공화주의자들 스스로 공화주의를 핵심적 사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들며, “마르크스의 아이디어는 단지 그만의 독특한 사상이 아니며, 마르크스 역시 공화주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19세기를 살았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민주공화국’이라면서도 “주 120시간 일할 자유”처럼 양두구육식 개념만이 판치고 있는 오늘날, 지은이가 되살려낸 노동공화주의의 전통은 자유라는 개념 그 자체에 집중하더라도 우리에게 절실한 가치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자유는 단순한 변론의 언어가 아니라 비판의 언어 그 자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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