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화가 많은 아이’도 끝내 사랑하기를

등록 2022-03-04 04:59수정 2022-03-04 09:10

[한겨레book]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루시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l 문학동네(2021)

<루시>는 서인도제도 앤티가섬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에 외국인 입주 보모로 미국 뉴욕에서 생활한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소설은 루시가 사시사철 여름뿐인 고향을 떠나 추운 1월에 미국 대도시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해가 화창하게 떴는데도 바깥 공기가 차가운 것이나 음식을 차갑게 보관하는 냉장고 같은 것들이 루시에겐 낯설기만 하다. 그때마다 루시는 반사적으로 고향과 엄마를 떠올리지만, 그럴수록 그것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을 상기한다.

열네 살 루시는 당시 영국령이었던 고향에서 ‘통치하라, 브리타니아! 브리타니아, 파도를 제압하라. 영국인은 절대, 절대 노예가 되지 않으리니’ 같은 노래의 합창을 거부했다. 자신의 조상인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역사를 알고부터는 절대 그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또 열 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선화를 찬미한 어느 영국 시인의 시를 강압적으로 외워야 했다. 청중 앞에서 그 시를 완벽하게 외워 큰 찬사를 받았던 날 밤 어린 루시는 수선화에 쫓기다 꽃 더미에 파묻히는 악몽을 꾼다. 그 이야기를 들은 루시의 현재 고용주 머라이어는 수선화와의 안타까운 인연을 고쳐주고 싶은 선의로 진짜 수선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는 정원을 루시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루시는 그 어떤 선의로 출발했든 각자 처지에 따라 같은 풍경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더 예리하게 자각할 뿐이다.

이렇듯 루시와 머라이어의 시선은 계속해서 엇갈리고 또 미끄러진다. 기차를 타고 휴가를 떠나던 날, 머라이어가 창밖으로 흙을 막 갈아엎은 땅을 보고 정말 좋아하는 풍경이라고 감탄하면, 루시는 자신이 옛날에 미국에 살았다면 분명 노예였을 텐데 “저 일을 내가 안 해도 돼서 정말 다행이네요”라고 대꾸한다. 머라이어의 눈에 루시는 ‘화가 많은 아이’이고 루시의 눈에 머라이어는 자신의 선의마저도 탄탄한 계급적, 인종적 우위에서 누릴 수 있는 행운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해맑은’ 가진 자다. 그러나 루시와 머라이어 사이는 단순한 고용-피고용 관계를 넘어 서로를 향한 연민에 기반한 ‘중년 여성-청년 여성’ 혹은 ‘유사 모녀 사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관계의 끈이 (너무 가늘어서 언제라도 끊어질 것만 같지만) 이어져 있다.

루시는 소설 속 1년 남짓한 시간에 사계절을 알게 되고, 다소 파행적인 우정과 성애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고향에서 날아온 비보가 루시에게 진정한 독립의 시기임을 일깨우고, 루시는 다소 폭력적인 홀로서기를 감행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는 어쩔 수 없는 루시의 냉소적인 시선과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향한 아슬아슬한 분투를 바라보며 연민을 품게 되는데, 루시 역시 독자의 그런 마음을 간파한 듯 세를 얻어 나간 작은 아파트에서 머라이어가 선물한 공책 첫 장에 다음과 같은 첫 문장을 적어본다.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것은 작가가 루시에게 선사한 문장이기도 하고 독자가 루시에게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므로 소설은 읽는 이에게 기이한 감정이입과 전위의 경험을 안겨주며 루시의 (그리고 어쩌면 뭇 독자의) 눈물과 함께 마무리된다.

소설가, 번역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추위에 쫓겨 닿은 땅…한국인은 기후난민이었다 [책&생각] 1.

추위에 쫓겨 닿은 땅…한국인은 기후난민이었다 [책&생각]

두 전쟁을 담은 국내 첫 장편…20년차 ‘공부’하는 작가의 도리 [책&생각] 2.

두 전쟁을 담은 국내 첫 장편…20년차 ‘공부’하는 작가의 도리 [책&생각]

‘진취적’ 왕후를 비추는 ‘퇴행적’ 카메라…우씨왕후 3.

‘진취적’ 왕후를 비추는 ‘퇴행적’ 카메라…우씨왕후

흥행 파죽지세 ‘베테랑2’…엇갈리는 평가에 감독이 답했다 4.

흥행 파죽지세 ‘베테랑2’…엇갈리는 평가에 감독이 답했다

현금다발 든 돼지저금통 놓고 운동회?…‘오징어게임2’ 예고편 5.

현금다발 든 돼지저금통 놓고 운동회?…‘오징어게임2’ 예고편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