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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포착된 순간, 아름답게 지속하여 변주되는

등록 2022-03-04 05:00수정 2022-03-04 09:18

영국 작가 제프 다이어가
세상에 없는 방식으로 풀어낸
재즈 뮤지션들의 굴곡진 삶과
사진가-사진의 포착된 관계

그러나 아름다운
제프 다이어 지음, 황덕호 옮김 l 을유문화사 l 1만8000원

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지음, 이정현 옮김 l 을유문화사 l 2만2000원

인간과 사진
제프 다이어 지음, 김유진 옮김 l 을유문화사 l 2만3000원

그러나 아름답다. 순간이지만 지속하기에 그렇다. 아름다운 순간은 멈추지 않는다. 찰나로 기록된 사진도, 잠시 귓전을 흘러 넘은 선율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양을 바꾸어 새롭게 탄생하고 사그라들다가 되살아난다. 멈출 듯 멈추지 않고 이어지다 문득 방향을 바꾼다. 고정된 것은 없다.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진이고 음악이다. 예술이 진정 그러하다.

제프 다이어(64·사진)의 <그러나 아름다운>(1991)과 <지속의 순간들>(2005), <인간과 사진>(2021)은 예술과 창작의 본질을 체감하게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은 재즈 음악인들의 삶을 재구성하고, <지속의 순간들>은 사진가와 사진 이야기다. 비교적 짧은 사진 리뷰들은 <인간과 사진>으로 엮였다. 비평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 창작이기도 하다. 창작과 비평의 경계는 아슬아슬하다. 재즈 뮤지션들의 인생을 묘사하는 서술은 예측할 틈을 주지 않고 변주를 멈추지 않는다. 비평 대상으로서의 피사체는 멈춰 있지만 거듭 중첩되고 저자의 시선은 창작의 순간을 잡아낸다. <그러나 아름다운>이 글로 연주하기라면, <지속의 순간들>과 <인간과 사진>은 글로 포착하기이다.

호텔 방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레스터 영, “검사 결과 그는 매독이었다. 그는 술과 약에 취해 있었고 각성제로 깨운 그의 심장은 시계처럼 째깍거렸다.” 그러나 그가 연주하던 테너 색소폰의 색다른 스타일이 그러했듯, “평소 레스터는 느슨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다이어가 <그러나 아름다운>에서 변주하는 레스터의 삶은 꿈인지 생시인지 가물가물하다. 환각에 젖은 것은, 레스터인가, 다이어인가, 아니면 행간을 헤매는 나인가. 읽는 속도는 아득하게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지고 끊겼다가 이어진다.

비밥 피아노의 선구자 버드 파월의 이야기에는 다이어가 뛰어든다. “난 자네가 요양원에서 보냈던 시간에 대해서 알고 싶어. (…) 전기충격요법과 신경안정제 치료를 받았고. (…)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거야, 버드.”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지만 중요하지 않다. 그의 내면을 탐구해 들어가는 데만 몰두한다. “예술가란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을 장점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믿어 왔네. 자네에게도 맞는 말인가, 버드?”

테너 색소포니스트 벤 웹스터는 “여전히 술 첫 잔을 마시면 익숙한 호전성이 치밀어 올랐지만 대여섯 잔이 지나면 (…) 알코올의 축축한 홍조만이” 남았다. 베이스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만든 ‘분노의 화신’ 찰스 밍거스에게 “미국은 그의 얼굴에 계속해서 불어닥치는 폭풍이었다.” “늘 떠나야 할 것처럼 보이는 남자” 쳇 베이커는 “늘 공허한 질문의 같은 얼굴, 같은 몸짓을 하고 있었다.” 한 시대를 뒤흔든 미국 재즈 뮤지션들은 술과 약물, 고질적인 차별에 시달리면서도 음악만으로 고된 여정을 헤쳐나갔다.

“사진의 지속적인 느낌은 무엇이 벌어져 왔고 뭔가가 막 벌어질 순간이라는 느낌을 포함해 얼어붙은 순간을 양방향으로 몇 초간 늘려 놓는다(혹은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아름다운> 서문 다음에는 이런 내용의 ‘사진에 관하여’가 놓여 있고 첫 장에는 ‘존 버거에게’ 헌정한다고 써 있다. 영국 소설가이자 화가인 존 버거(1926~2017) 역시 독특한 사진비평으로 유명하다. 그를 스승처럼 여기는 다이어는 버거에게 바친 <그러나 아름다운>을 쓴 14년 뒤 <지속의 순간들>로 그의 뒤를 따른다.

역시 수많은 사진가와 작품들이 <지속의 순간들> 안에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에서 재즈가 이미지를 지녔다면 이 책의 사진은 리듬을 느끼게 한다. 폴 스트랜드가 찍은 ‘눈먼 여성, 뉴욕’(1916)에서 시작해 루이스 하인의 ‘이탈리아인 시장 구역의 눈먼 걸인’(1911), 게리 위노그랜드의 ‘뉴욕’(1968?),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의 ‘뉴욕’(1993) 등을 지나, 워커 에번스의 ‘뉴욕’(1938), 브루스 데이비드슨의 ‘지하철’(1980~1981) 등을 거쳐 시각 장애인이라는 반복된 피사체가 변주되며 음률을 이룬다. 또한, 시각 장애인의 아코디언 연주 장면을 다리 삼아 해군 장교의 아코디언 연주 장면을 담은 에드 클라크의 ‘귀향’(1945)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여성의 나체와 눈, 등, 모자, 계단, 이발소 등의 피사체들도 이 책의 리듬감을 형성한다.
2017년 제프 다이어의 모습. ©Basso CANNARSA/Opale
2017년 제프 다이어의 모습. ©Basso CANNARSA/Opale

사진작가를 중심으로도 이야기는 펼쳐 나간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1864~1946)에서 폴 스트랜드(1890~1976), 에드워드 웨스턴(1886~1958)으로 뻗어나오고, 도로시아 랭(1895~1965)으로 시작해 벤 샨(1898~1969), 로디 디캐러바(1919~2009), 게리 위노그랜드(1928~1984)를 지나 외젠 아제(1857~1927), 워커 에번스(1903~1975)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작가와 피사체가 만들어낸, 즉 작가가 피사체를 포착하는, 혹은 피사체가 작가를 사로잡는 순간들은, 느리다가 빠르게, 종종 방향을 바꿔가며, 마치 재즈처럼 지속한다. <지속의 순간들> 이후 여러 지면에 기고해온 글을 모은 <인간과 사진>은 이러한 다이어의 비평 작업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이 책 세 권은 서로 연결되어 흐름을 이룬다. 그러나 세 권의 책은 물론 각각의 책조차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불규칙이 이뤄내는 규칙, 순간이 만들어내는 지속성, 정해진 궤도 안팎을 줄타기하는 아슬아슬함 등을 시각과 청각으로 느끼며 읽어내려가는 것이 좋겠다. 사진을 모르고 재즈가 어려워도 상관없다. 다이어는 사진을 찍지도 않고 카메라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사진에 관한 글을 써왔다. 다이어는 악기를 다루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음악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하고, 실제로 보여줬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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