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불의에 대항하는 제1방어선
여성의 분노 ‘통제’해온 가부장제 사회
억누르지 않고 분노해야 변화시킬 수 있어
여성의 분노 ‘통제’해온 가부장제 사회
억누르지 않고 분노해야 변화시킬 수 있어
소라야 시멀리 지음, 류기일 옮김 l 문학동네 l 1만9500원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화가 난 상태에서 말하면 나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으레 후회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다. 준비가 되면 그때 이야기하겠다.” 2017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을 시작으로 권력 있는 남성들의 성적 괴롭힘과 성폭행 행각이 폭로됐을 때,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배우 우마 서먼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명 배우인 그가, 그것도 영화 <킬 빌>에서 거침없는 분노를 폭발시키며 복수극을 펴는 강인한 여성을 연기했던 그가,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가 정확히 말한 대로 모든 여성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여성은 결코 ‘좋은 여성’이 될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을. “예민하다” “유별나다” “짜증난다” “비이성적이다” 같은 부정적인 평가뿐 아니라, 때론 분노의 대가로 언제든 폭력과 공포까지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이 세상은 도저히 분노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여성들에게 잔뜩 안겨주면서도, 정작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비평가인 소라야 시멀리(56)는 2018년에 펴낸 첫 책 <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에서 이처럼 부당한 현실을 만들어온 젠더불평등 구조를 파헤치고, 여성의 분노는 되레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핵심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자신과 주변의 경험, 수많은 연구 결과와 통계, 사례 등을 폭넓게 동원해 가부장제 사회문화가 여성의 생애 전 주기 동안 거의 모든 방면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여성의 분노를 ‘통제’하고 있는지 고발한다. 여러 연구를 통해 감정 역시 철저하게 ‘젠더화’되어 있으며 가정과 사회가 이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면에 탑재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났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남성은 분노를 자연스러운 것, 더 나아가 장려할 만한 것으로 허용받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 남성이 남성성이라는 망토의 보호 아래 분노를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동안 여성은 자신보다는 주변의 감정과 필요를 우선시하고 이에 우호적이고 협조적일 것을 일관되게 요구받는다. 젠더 규범이 요구하는 여성성은 분노를 슬픔으로 전환하도록 만든다. “분노는 ‘접근’의 감정인 반면 슬픔은 ‘후퇴’의 감정이다.” 주도적으로 환경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환경 속에 머무르고 자신을 반추하는 데에 붙들리는 셈이다. 조금만 분노의 기미를 비쳐도 “히스테리를 부린다”, “같이 일하기 어렵다” 따위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응징’을 당하는 환경 속에서 여성이 화내는 것은 아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없는 모험일 뿐이다.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한 여성이 분노한 표정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미국의 페미니즘 활동가 소라야 시멀리는 “여성으로서 우리의 분노는 급진적 상상의 행위”라고 말한다. 과달라하라/AFP 연합뉴스
지난 8일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는 수만명의 여성이 참석해 한 나라에서 하루에 10명 이상의 여성이 살해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과달라하라/EPA 연합뉴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