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세스 노터봄 지음, 금경숙 옮김 l 뮤진트리(2019) 코로나 시절을 사는 내가 여행이 가고 싶으면 순식간에 그 마음을 잠재울 처방으로 읽은 작가가 있었다. 세스 노터봄이다. 그의 보석 같은 책, 두툼한 <산티아고 가는 길>을 읽으면 이런 말이 절로 흘러나온다. “아이고, 그가 봤으니 나는 됐어!” 그러고는 슬그머니 책을 덮는다. 그러면 여행의 욕망이 연기처럼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물론 그때 마음속으로는 이글이글 살을 익힐 듯한 폭염 속 스페인의 황량한 시골길 먼지 속을 달리는 나를 상상하기도 한다. 나는 지구상 아무도 그 가치를 모르는 허름한 시골 교회의 벽화를 보러 가는 중이다. 빼어난 심미안과 지식을 가진 나만이 오직 그 가치를 알아보고 이걸 봤으니 여한이 없지만 그래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최후의 아름다움은 공유하자면서 일장 연설을 한다. 이런 망상에 빠졌다가 그냥 잔다. 이런 생각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유목민 호텔>은 12세기 아랍 철학자 이븐 알 아라비의 말로 시작한다. “존재의 근원은 움직임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부동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니, 존재가 움직일 수 없다면 그 원천인 무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정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펄쩍 뛰면서 반길 말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모든 중요한 경험은 움직임과 만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세스 노터봄은 얼마나 움직였을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실없이 모아들인 호텔 편지지로 자신이 잠들었던 장소들을 시처럼 읊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브루나이의 앙스 호텔, 사모아의 애기 그레이스 호텔, 통가 누쿠알로파의 데이트라인 호텔…. 그뿐이 아니다. 평생 묵었던 호텔의 객실 번호를 모두 더한 숫자에 운명과 성격에 대한 암호화된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다만 방 번호를 기록해두지 않았으니 실제 그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는 숫자를 알 방법은 없다. 그런 그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디어 하나를 내놓았다. 이상적인 호텔에 대한 아이디어다. 이상적인 호텔에는 뭐가 있어야 할까? 과일즙 잔에서 쨍그랑거리는 극빙? 잔디밭에 있는 뒤로 늘어지는 안락의자? 혹은 고요에 감싸인 만물? 아니면, 있어야 할 것 말고 없어야 할 것으로 시작하는 이상적인 호텔상은 어떨까? 옆방 사람이 웅얼거리는 소리는 안 되고, 딴 사람이 남긴 욕정의 흔적이나 사랑을 나누는 소리도 안 되고, 고급 위스키가 든 냉장고도 안 되고, 복도의 청소기 소리도 안 되고, 텔레비전도 안 된다! 아무튼 그는 계속 이상적인 호텔을 짓는다. 날은 무더운데 호텔의 윗부분은 스페인 갈라시아 지방의 가을 바람이 우리를 감싸야 하고, 일층 잔디밭에는 도마뱀붙이의 소리가 들려야 하고(그 녀석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기에 세스 노터봄은 행복하다), 물소들이 팬을 돌려주고 저 멀리서 파도의 포효 소리가 들려오고…. 이쯤 해서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다. 이상적인 호텔이라면 나도 한도 끝도 없이 지을 수 있다. 일단 유리창은 새 충돌 방지 스티커가 무조건 붙어 있어야 하고, 고개를 들면 언제나처럼 저 높은 곳에서 빛나는 만년설이 있어야 하고, 밤에는 불을 다 꺼서 별이 초대형으로 보여야 하고, 호텔의 나선형 계단은 바다로 통해야 하고, 그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이상적인 호텔에 대한 상상은 매일 밤 커져서 이젠 환상적인 여행에 대한 상상으로 커지고 있다. 그리고 이 환상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보고 싶은 아름다움은? 정혜윤 <CBS>(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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