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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민주주의는 불확실성과 가능성 안에서 존재한다

등록 2022-03-18 05:00수정 2022-03-18 15:26

[한겨레BOOK]
민주주의의 “타협할 수 없는 경계”에 대한 물음
선거 패배가 곧 민주주의의 위기인 것은 아냐
소수도 언제든 다수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정치 체제의 자유롭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동료 시민의 입지를 훼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누구도 자신만의 팩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공부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l 윌북 l 1만7800원

전세계적으로 권위주의적인 포퓰리즘 정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며, 누구나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대통령 선거와 같은 거대한 정치 이벤트를 치를 때면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인식과 감정이 더욱 극대화된다. 그러나 명백하게 부적격이라 생각되는 후보가 최고위 선출직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곧 민주주의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일까?

독일 출신 정치학자 얀-베르너 뮐러(52) 미국 프린스턴대학 교수는 <민주주의 공부>(원제 Democracy Rules, 2021)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어떤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포퓰리스트의 선동에 넘어가버린 우매한 국민들에게, 또 다른 일부는 돈 많고 힘 있는 음험한 권력층에게 모든 문제의 원인을 돌리곤 한다. ‘누군가 민주주의를 끝장내려 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은이는 마키아벨리의 조언대로 “첫 번째 원칙으로 회귀”하여, 민주주의의 핵심 ‘정신’과 그 작동 방식은 어떤 것인지 등을 탐사하는 데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읽기 위한 명료한 분석을 펼친다.

포퓰리즘에 대한 탁월하고 비판적인 고찰(<누가 포퓰리스트인가>)로 잘 알려진 정치학자답게 지은이는 전세계 정치 상황, 특히 여러 포퓰리즘 정권의 사례들을 풍부하게 동원한다. 지은이는 엘리트 비판이나 민족주의 등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진짜 국민’(또는 ‘침묵하는 다수’)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포퓰리즘의 진정한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대표성에 대한 도덕적 독점 선언”을 통해 끊임없이 ‘가짜 국민’을 만들고 이들을 갈라치기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문제는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해진 사회에서 이런 부추김이 효과를 본다는 사실이다. 포퓰리스트가 국민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냈다거나, 포퓰리즘 정권이 낳은 일들은 시민들의 욕망의 결과였다는 식의 해석은 명백히 틀렸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이 숨겨둔 권위주의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기보다, 민주주의 이론에 따라 양당제에서 한 정당이 신뢰를 잃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했을 뿐이다.”

제20대 대통령선거 이튿날인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오금역 인근에서 가락본동주민센터 관계자들이 대선 벽보를 철거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20대 대통령선거 이튿날인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오금역 인근에서 가락본동주민센터 관계자들이 대선 벽보를 철거하고 있다. 연합뉴스

“첫 번째 원칙으로 회귀”해볼 때 민주주의의 “타협할 수 없는 경계”를 이루는 핵심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불확실성이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특히 강조하는 것은 평등과 불확실성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기로 꼽히는 것, 혹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가져온 가장 큰 해악 중 하나는 ‘가짜 국민’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충실한 반대파’로서 정치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평등이 가로막힌다는 것이다. 애당초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에서 졌다는 것은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민’은 어떤 인구학적 결정론에 따라 고정되어 있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며, 이들이 최대한 동일한 정치적인 평등을 보장받는다는 전제 아래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갈등하며 언제든 자신의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불확실성이야말로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지닌 최고의 장점이다. 그러나 국민을 갈라치는 데에서 이익을 얻는 포퓰리스트는 이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며, 이에 따라 상대편의 승리를 자신의 일시적 패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을 향한 중대한 위협이며 정치 체제의 종말”로 만들려고 한다. ‘나쁜 편이 이기면 우리 모두 죽는다’, ‘우리가 이기지 못한 걸 보니 이 시스템은 썩었다’는 식이다.

결국 “사람들이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 자체를 임의로 바꿀 수 없으므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에게 주어지는 선택지, 즉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다.” 예컨대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이 ‘충실한 반대파’가 될 수 있으려면, 그에게 투표 이외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충분한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지은이는 시민들이 서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고 갈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구조화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매개 기구’, 곧 정당과 언론을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로 꼽는다. 민주주의에는 지정된 시각에 모여서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장소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의견이 형성되고 정치적인 판단이 내려질 장소가 필요하며, 이 둘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 정치학자 얀-베르너 뮐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위키미디어 코먼스
독일 출신 정치학자 얀-베르너 뮐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위키미디어 코먼스

 “우리 후보에 대한 지지보다 상대 후보에 대한 반대”를 중심으로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는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세계에 만연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에 대해, 독일 출신 정치학자 얀-베르너 뮐러는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가 핵심 문제라고 짚는다.

오늘날 정당과 언론은 시대착오적인 기구이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주범이라는 비판도 거세다. 기계적인 중립을 앞세워 오히려 전체적으로 비중립을 강화하는 레거시 미디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만 지은이는 “좋든 싫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의 틀은 여전히 매개 기구, 특히 정당과 전문 언론 매체가 만든다”며, 불확실성을 제도화할 수 있는 매개 기구의 필요성 자체는 절실하다고 짚는다. 정당과 언론이 접근성, 정확성, 독립성을 높이는 것, 특히 시민의 평가에 따라 이들에게 책임성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주장한다. “최선의 대응은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규제하고, 시민에게 정당과 언론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원을 주어 직접 망가진 것을 고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힘센 자들의 사적 영향력을 제한하는 대신 모든 시민에게 정당과 언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바우처를 제공하는 방안 등을 도입할 수 있다.

지은이는 “민주주의에는 어떤 보장도, 미리 정해져 있는 목표도 없지만, 타협할 수 없는 한계는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그것은 “정치 체제의 자유롭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동료 시민의 입지를 훼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누구도 자신만의 팩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지은이는 그땐 “민주적인 형태의 불복종”이 정당화된다고 말한다. 다만 “불복종하는 이는 자신의 저항이 당파적 갈등에서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곧 그 위협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판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짚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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