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1967년, 테라코타(좌대: 나무). ©권진규기념사업회·이정훈
권진규허경회 지음 l 피케이엠 북스 l 2만2000원
<권진규>는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예술과 생애를 다룬 평전이다. 글이 있고 이미지가 있고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그런데 책을 넘어선다. 문자와 언어, 이미지 너머로 마음이 느껴진다. 안타까운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평가받고 눈길을 끈 이른바 ‘비운의 천재’ 권진규. 이 책의 저자는, 그러나 ‘비운’과 ‘천재’를 지워버린다. 그 자리에 ‘나력’(裸力), 벌거벗은 힘을 써넣는다. 영국 시인 테니슨이 노래한바, ‘참나무’가 봄여름가을의 밝고 무성하고 맑은 빛을 거쳐 겨울에 이르러 “잎은 모두/ 마침내 떨어지지만/ (…) 몸통과 가지로/ 벌거벗은 힘으로” 서 있는 모습에서, 권진규의 모습을 발견한다. 지은이가 권진규의 생과 사를 곁에서 살핀 조카, 미술 전문가 아닌 피붙이였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손>, 1963년, 테라코타. ©권진규기념사업회·이정훈
<권진규>는 나력의 삶을 네 계절로 형상화한다. 권진규는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평생의 사랑, 오기노 도모를 만난다. 그러나 봄은 짧다. 신진 작가는 아내를 두고 귀국한다.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 서기 위해 결행한 예술적 ‘탈바꿈’의 의식”이었다. 도모와의 이별을 무릅쓰고 고된 서울살이 속에 작업에만 몰두했다. 냉대 속에 꿋꿋하다가 일본 전시에서 호평을 받으며 재기의 탈출구를 찾았으나 운명은 가혹했다. 짧은 재회 끝에 도모와의 인연은 영영 끊어졌다. 그렇게 여름은 막을 내렸다. 가을은 자신과 쓸쓸히 만나며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생전 마지막, 세번째 개인전에서도 알아주는 이는 없었지만 “절개를 품은 끝에 말라죽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벌거벗은 힘으로’ 꿋꿋이 겨울에 이른다.
<불상>, 1971년, 나무에 채색. ©권진규기념사업회·이정훈
<권진규>는 예술가의 생을 되짚으며 작품들로 계절을 꾸민다. 여러 <도모>들과 <마두> <기사> 등 봄의 화사함과 새 의지를 거쳐, <춤추는 뱃사람> <두 사람> <지원의 얼굴> <해신> <재회>는 여름날의 치열한 희망과 아픔을 담아낸다. 가을에 이르러 여러 <자소상>들과 <손> <십자가 위 그리스도>로 권진규는 천착했다. <불상>과 <입산> <흰소>는 종착으로 가는 작품들이다. 이 책 독자는, 젊고 외롭고 드높았던 예술가의 죽음을 이해하고 기억하고 애도하려는 고요한 몸부림을 느끼게 된다. 불쑥불쑥 등장하는 지은이의 독백은, 애절한 초혼처럼 느껴지기도, 때로 권진규의 목소리와 합쳐지기도 한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이한 권진규의 사계, 조카 허경회가 새기고 깎고 빚어낸 외삼촌의 삶은,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