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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독자를 단번에 십대 시절로 끌고 가는 소설

등록 2022-04-01 04:59수정 2022-04-01 08:45

[한겨레Book] 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2022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보미 불장난 외
손보미 외 지음 l 문학사상(2022)

툭하면 눈물이 났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몰라주는 게 야속했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열심히 말해줘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가 놀라웠다. 이렇게 시뻘건 고통을 보지 못하다니! 눈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발을 구르고, 못했던 말들을 읊조리며 주먹을 쥐고, 이불을 둘러쓰고 울음을 토했다. 다음날이 되면 다시 학교에 가고,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휘말리고, 다시 방에 틀어박혀 이를 악물었다. 어른이 되기만 하면. 그땐 가만히 있지 않겠다. 모조리 기억했다가 되돌려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 터질 것처럼 마음이 부풀어올랐고, 눈부시게 빛나는 세상을 향해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아, 재미있어. 세상엔 재미있는 게 참 많구나!

그렇게 십 대 시절을 건넜다. 그리고 어느 날,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알았다. 내가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지나온 지 한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시절 주먹을 쥐고 ‘되돌려주겠다’ 다짐했던 대상들보다 더 나이 먹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손보미의 ‘불장난’은 독자를 단번에 십 대 시절로 끌고 가는 소설이다. 책장을 두어 장 넘기는 행위만으로 독자는 당시의 정서와 열기에 고스란히 휩싸이게 된다. 당시에 보이던 것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들리던 것과 들리지 않던 것들이 귓전을 두드린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건너가던 시기에 일었던 마음의 파동. 아프게 찔러오는 소외감과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끈덕진 열망,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괴로움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소설 속 화자는 외적인 사건들보다 제 내면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다. 십 대 소녀인 화자가 옥상에 올라가 훔친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메모지와 참고서를 태우면서 희열을 느끼는 장면을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불현듯 알게 된다. 그것이 소녀가 세상에 서툴게 딛는 첫 발자국이자 신고식임을. 그리고 비로소, 그 신고식을 빚어낸 외부 요소들을 인식하게 된다. 부모의 이혼과 재혼, 이사와 집단 따돌림이라는 사건들을. 그것은 소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맞이해야 했던 거대한 변화들이었다. 소녀가 불을 붙이는 행동을 통해 전능감을 느끼고, 그런 제 경험을 ‘글’이라는 사회적 장치에 담아내고, 타인들에게 그 글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잠재해 있던 자기 의지를 실현하는 장면에 이르면 독자는 십 대 시절 자신을 추동하던 수많은 에너지들이 일제히 되살아는 걸 느낀다. ‘진짜’ 세상과 맞닿았을 때 불현듯 튀어나오던 나의 의지, 나의 목소리, 나의 몸짓을 선명하게 감각하고 전율한다.

화자인 십 대 소녀의 목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내면의 결이 너무 또렷해서, 읽으면서 몇 번씩 움찔거렸다. 모르는 새 누군가의 속살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던 것처럼. 많지 않은 분량의 지면을 통해 이처럼 뜨겁게 타인의 마음과 접속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내면에 맞닿는 일이 동시에 나도 몰랐던 내 십 대 시절의 마음을 또렷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는 사실도 놀랍다. 이 모든 일들이 극도로 절제된 묘사와 서술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 역시, 놀랍다는 말 외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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