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이권우의 인문산책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l 민음사(2022) 김수영을 읽고 싶었다. 정치의 계절이 끝나고 무수히 쏟아져 나온 정치담론을 보며 답답했다. 적대적 공존상태에 놓인 거대 양당구조를 넘어 새로운 꿈을 꾸는 이야기는 가물에 콩 나듯 나왔다. 정말 ‘87년 체제’로 만족하고, 권력의 향방만 바뀌었더라면 괜찮았다는 말일까. 철학적 성찰은 없고 정치적 공학만 넘쳐났다. 왜 담론의 수준이 이 정도에 그치는지는 우석훈의 <슬기로운 좌파생활>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긴 하다. 이른바 진보라는 집단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보수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했는지라 “사법개혁, 개헌, 인권 혹은 적폐청산” 같은 상부구조의 개혁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한때 좌파”였던 이들마저 이 대열에 동참했으니 “한국의 진보는 집권을 위해 임시적으로 모여 있는 이익집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처음에는 김수영 전집을 차분히 읽어갈까 하다가, 김응교의 <김수영, 시로 쓴 자서전>과 산문선집 <시여, 챔을 뱉어라>를 꺼내 들었다. 개인적으로 김수영의 시는 난해한 편이라 여긴다. 여러 차례 곱씹어 읽어보고 다른 시와 비교해 보아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김응교의 책은 큰 도움이 되었다. 김수영의 삶에 대한 실증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그의 시를 꼼꼼하게 해설하는지라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김응교는 김수영 시 세계를 설움에서 긍지로의 전환이라 보았다. 특히 김수영의 시에서는 패배자의 초상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시련의 늪을 희열을 느끼며 기어가는 존재, 곧 주이상스로 극복해내는 주체”가 돋을새김된다는 해설에는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해설과 함께 거듭해 읽은 시는 그냥 발췌만 해놓아도 더 나은 세상에 관한 꿈을 잃은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본디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고 선량하기까지 하며 민주주의를 가장하고 있다. 얕잡아보았고 쉽게 경계를 풀었으며 끝없이 성찰하지 않았다. 마치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 고난이 풍선같이 바람에 불리거든 너의 힘을 알리는 신호인 줄 알아야 할 터다. 바로 보아야 한다.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서는? 공자의 말대로 죽어도 좋을 게다. 이제 다시 희망을 품자.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는다.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인 법이다.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고 혁명은 고독하게 마련이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려면,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이제 다시, 풍자냐 해탈이냐의 정신으로 살면 된다. 산문이야 말해 무엇하랴. 처음 김수영을 만났을 때 시보다 산문을 더 좋아했으니 말이다.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절실한 정신이지 않겠는가.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는 영구혁명의 정신이 없이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겠는가. 김수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시인이다. 도서평론가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l 민음사(2022) 김수영을 읽고 싶었다. 정치의 계절이 끝나고 무수히 쏟아져 나온 정치담론을 보며 답답했다. 적대적 공존상태에 놓인 거대 양당구조를 넘어 새로운 꿈을 꾸는 이야기는 가물에 콩 나듯 나왔다. 정말 ‘87년 체제’로 만족하고, 권력의 향방만 바뀌었더라면 괜찮았다는 말일까. 철학적 성찰은 없고 정치적 공학만 넘쳐났다. 왜 담론의 수준이 이 정도에 그치는지는 우석훈의 <슬기로운 좌파생활>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긴 하다. 이른바 진보라는 집단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보수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했는지라 “사법개혁, 개헌, 인권 혹은 적폐청산” 같은 상부구조의 개혁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한때 좌파”였던 이들마저 이 대열에 동참했으니 “한국의 진보는 집권을 위해 임시적으로 모여 있는 이익집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처음에는 김수영 전집을 차분히 읽어갈까 하다가, 김응교의 <김수영, 시로 쓴 자서전>과 산문선집 <시여, 챔을 뱉어라>를 꺼내 들었다. 개인적으로 김수영의 시는 난해한 편이라 여긴다. 여러 차례 곱씹어 읽어보고 다른 시와 비교해 보아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김응교의 책은 큰 도움이 되었다. 김수영의 삶에 대한 실증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그의 시를 꼼꼼하게 해설하는지라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김응교는 김수영 시 세계를 설움에서 긍지로의 전환이라 보았다. 특히 김수영의 시에서는 패배자의 초상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시련의 늪을 희열을 느끼며 기어가는 존재, 곧 주이상스로 극복해내는 주체”가 돋을새김된다는 해설에는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해설과 함께 거듭해 읽은 시는 그냥 발췌만 해놓아도 더 나은 세상에 관한 꿈을 잃은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본디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고 선량하기까지 하며 민주주의를 가장하고 있다. 얕잡아보았고 쉽게 경계를 풀었으며 끝없이 성찰하지 않았다. 마치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 고난이 풍선같이 바람에 불리거든 너의 힘을 알리는 신호인 줄 알아야 할 터다. 바로 보아야 한다.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서는? 공자의 말대로 죽어도 좋을 게다. 이제 다시 희망을 품자.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는다.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인 법이다.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고 혁명은 고독하게 마련이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려면,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이제 다시, 풍자냐 해탈이냐의 정신으로 살면 된다. 산문이야 말해 무엇하랴. 처음 김수영을 만났을 때 시보다 산문을 더 좋아했으니 말이다.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절실한 정신이지 않겠는가.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는 영구혁명의 정신이 없이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겠는가. 김수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시인이다.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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