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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일의 두려움

등록 2022-04-15 05:00수정 2022-04-15 10:04

[한겨레Book]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우리 모두
레이먼드 카버 지음, 고영범 옮김 l 문학동네(2022)

마음을 파고드는 시가 수두룩한 레이먼드 카버의 시집 <우리 모두>에는 ‘두려움’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경찰차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걸 보는/ 두려움. 밤에 잠드는 일에 대한/ 두려움. 잠 못 드는 일에 대한/ 두려움. 지난 일이 떠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현재가 빨리 지나가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한밤중에 울리는 전화에 대한/ 두려움 (…) 돈이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무도 안 믿겠지만, 너무 많이 소유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지각하는 것, 제일 먼저 도착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 편지 겉봉에 쓰인 내 아이들의 손글씨에 대한/ 두려움. 그 아이들이 나보다 먼저 죽을까봐,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봐/ 두렵다. 늙은 내가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할 거라는/ 두려움. 혼돈에 대한/ 두려움. 오늘 하루가 불행한 기록과 더불어 끝날 것 같아/ 두렵다. 잠에서 깨어나 네가 떠난 걸 알게 되는 일의/ 두려움. 사랑하지 않는 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일의/ 두려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될까/ 두렵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너무 오래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건 벌써 말했다.”(‘두려움’ 부분)

그의 두려움과 나의 두려움이 마구마구 겹친다. 오늘은 삶과 봄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일의 두려움”이 컸다. 어제는 한밤중에 울리는 전화에 대한 두려움을 겪었다. 내일은 너무 오래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릴지 모르겠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 것에 대한 두려움은 늘 존재한다. 우리 시대가 우리에게 만들어 준 두려움은 어떨까? 코로나에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은 이미 극복했을까? 고독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건? 일하다가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차별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건?

두려움에 대해 자꾸 생각하다 보니 기억 속 어느 하루가 떠오른다. 세월호 참사 일년 후, 당시 유족들은 사랑하는 아이를 떠나보내고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몸서리쳐지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세월호 유족들은 광주에 가서 5·18 어머니들을 만나서 물어볼 참이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자식을 잃고 그 긴긴 시간 동안 어떻게 삶을 견디며 살아내셨어요?” 나는 세월호 유족들과 함께 광주로 갔다. 우리가 차에서 내렸을 때 날씨는 어땠던가? 봄바람이 불었던가? 나는 그 순간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세월호 어머니 중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눈 녹은 다음 날 공기 같아.” 우리는 무심코 저마다 목을 길게 빼고 코를 벌름거렸다. 공기는 깨끗하고 차갑고 신선했다. 그리고 그 공기 아래, 싱그러운 연둣빛 일렁이는 거리에는 5·18 어머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세월호 어머니들을 꽉 끌어안을 준비를 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두렵지만 느낄 수 있다. 두렵지만 두려움이 모든 걸 집어삼키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두렵지만 두려움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을 수 있다. 두렵지만 뭔가 쓸모있는 일을 해보려고 애쓸 수 있다. 두렵지만 마음속에는 또 다른 목소리도 있다. 기적과 결코 슬프게 끝나지 않는 사랑을 바라는. 우리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세상에서 바로 이런 방식으로 뭔가를 이룰 수도 있다. 내 생각엔 세월호와 많은 재난 참사 가족들이, 또 다른 큰 슬픔을 겪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내고 있다. 경의를 표한다.

<CBS>(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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