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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고정관념의 잔인한 힘

등록 2022-04-29 05:00수정 2022-04-29 10:34

[한겨레BOOK] 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자두
이주혜 지음 l 창비(2020)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에게 반찬을 해다 드리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한번은 초등학생인 아들을 대동하고 갔는데, 요리해 간 반찬을 밀폐용기에 덜어드리기 위해 아들이 젓가락을 집어 들자 앉아 계시던 어르신이 벌떡 일어나서 손사래를 치셨다. “남자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 비쩍 마른 어르신의 몸에서 나오는 근엄하고 힘찬 목소리에 나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에이, 할머니. 요즘엔 남자들도 음식도 하고 그래야 나중에 잘 살아요.” 이렇게 말하며 상황을 무마했지만, 그 후 어르신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게 저려왔다. 거만하고 안하무인인 분이었다면 마음껏 미워할 수 있었을 텐데, 그분은 선량함이 뚝뚝 묻어나는 눈매를 한 어르신이었기에 미움을 품고 있기가 힘들었다.

자라는 동안 몸과 마음에 새겨넣은 고정관념은 생명력이 질기다. 좀처럼 변하지 않고, 변하더라도 끈질기게 원형을 기억해 순식간에 원래 형태로 돌아간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다. 특히 평생에 걸쳐 ‘옳은 것’이라 믿었던 관념의 경우는, 자기처럼 사고하지 않는 상대에게 호통을 치는 무례함으로 연결되고, 이는 종종 호감을 품고 다가가려던 사람의 마음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불행으로 귀결된다.

<자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남편과 그의 아버지를 대해온 한 여성이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불합리한 통념 앞에서 마침내 맞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과정을 촘촘하게 그린 중편소설이다. 남편의 아버지는 아들의 배우자를 ‘며느리가 아니라 딸처럼’ 대하고, 혼자서도 살림을 잘 꾸려나가며, 아들 내외에게 부담이 될까 봐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로맨스 그레이’의 현신이다. 그러나 병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그는 어느 순간 숨겨왔던 본심을 드러내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화자는 ‘로맨스 그레이’로 보였던 사람이 실제로 며느리인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아왔는지를 깨닫고 망연자실한다.

돌봄은 가장 치밀한 만남이다. 사람은 돌봄을 통해 타인에게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가며, 그 과정을 통해 깊은 유대감을 맺거나, 극단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리게 된다. 며느리에게 병시중을 받는 소설 속 시아버지나 봉사활동 당시 내가 반찬을 해 들고 찾아갔던 어르신에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상대를 기분 상하게 할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의도치 않았던 순간 평생 유지해온 고정관념을 드러냈고, 자신에게 다가왔던 타인의 손길을 세차게 밀쳐내는 효과를 낳았다.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고정관념이 역사적인 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한 개인의 윤리적 자부심의 원천으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해버리는 이 시대에, 이런 종류의 고정관념은 세대와 세대를 갈라놓는 거대한 벽이 된다. <자두>의 작가는 이러한 문제를 세심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파고든다.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말해버리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선량한 마음들을 영원히 멀어지게 만드는 ‘고정관념’의 잔인한 힘을 또렷하게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 또한 그 힘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타자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희미한 희망의 빛을 선사하기도 한다. 소설가 정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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