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철학자 사토 요시유키와 다구치 다쿠미가 쓴 <탈원전의 철학>(도서출판b)을 읽다가,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1903~1933)가 주창한 ‘책임의 원리’라는 개념을 만나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요나스는 인간 스스로도 통제하기 어려울 현대 과학기술의 가공할 만한 힘 앞에서 더이상 ‘지금 존재하는 자’만을 고려하는 윤리학을 붙들어선 안 되며, ‘아직 존재하지 않은 자’까지 책임지는 새로운 윤리학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존재하는 자’는 단지 언젠가 존재할 것이란 가능성에만 기대고 있다는 이유로 지금은 아무런 권리도 내세울 수 없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자’를 구조적으로 차별하고 착취하고 있다는 겁니다.
최근에는 그보다 더 세게 머리를 때리는 듯한 개념을 만났습니다. 소비에트 아방가르드를 다룬 책 <혁명의 넝마주이>(문학과지성사)에 나오는 ‘러시아 우주론’입니다. 1860년대 이를 처음으로 개진한 니콜라이 표도로프(1829~1903)는 인류가 힘을 모아 이미 죽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모두를 위한 불멸’을 주장했다 합니다. 모든 산 자들이 죽은 자들 덕분에 살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미래 세대를 위한다며 제시되곤 하는 유토피아는 어쩌면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한 산 자들의 차별과 착취에 기반한 건 아닐까요?
어떻게 들어도 이상한 소리로 들리는 건 확실합니다만, 그 범위를 최소화해도 부담스러울 ‘책임’의 한계를 시공간까지 초월한 아득한 우주로까지 확장하겠다는 대담한 사유에는 탄복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우린 지금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빈곤 속에 살고 있으니까요.
최원형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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