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소설 ‘작고 빨간 의자’
90년대 보스니아 집단학살 다뤄
고통과 슬픔의 이야기 나누며
환대 베푸는 난민들의 연대도
90년대 보스니아 집단학살 다뤄
고통과 슬픔의 이야기 나누며
환대 베푸는 난민들의 연대도

2012년 4월6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의 마르샬티토 거리에 20년 전 보스니아 전쟁 당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빨간 의자 1만1541개가 놓여 있다. 소설 <작고 빨간 의자>는 이 추모 행사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 Arman D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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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이문희 옮김 l 눌민 l 1만5800원 1990년대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와 분열 과정에서 참혹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가 벌어졌다. 특히 지금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는 1992년 4월5일부터 1996년 2월29일까지 4년 가까이 수도와 전기, 음식, 의약품 등이 끊긴 채 봉쇄되었으며,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당시 사태를 주도한 인물이 라도반 카라지치. 세르비아계 스릅스카공화국 대통령으로 사라예보 포위전을 지휘하며 민간인 1만여 명을 학살하고, 스레브레니차에서 인종청소를 주도해 민간인 8천여 명을 살해한 전쟁범죄자다. 사태 뒤 대체의학 신비주의자로 변장해 10년 넘게 도피 행각을 이어가던 그는 2008년에 체포되어 네덜란드 덴하흐(헤이그) 전범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았다. 아일랜드 작가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2015년작 소설 <작고 빨간 의자>에는 바로 이 라도반 카라지치를 모델로 삼은 악당 블라디미르 드라간이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책 제목은 2012년 4월6일 사라예보 마르샬티토 거리에 빨간 의자 1만1541개를 놓아 20년 전 봉쇄 당시 희생자들을 추모했던 행사를 가리킨다. 의자들 가운데 643개의 ‘작고 빨간 의자’가 어린 희생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아일랜드의 한적한 마을 클루노일라에 정체 모를 남자가 나타난다. 섹스 치유사로 자신을 소개한 블라디미르 드라간 박사는 동서양 의학을 접목한 총체적 치유법을 표방한 치료소를 열고 손님을 맞는다. 북클럽을 이끌던 포목상의 아내 피델마가 이 낯선 남자에게 매혹되고, 그 일은 피델마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결국 정체가 드러난 박사가 전범으로 체포된 뒤 피델마 역시 드라간과 관련된 남자들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하고, 집을 떠나 런던으로 도망친다. 피델마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 후반부에서는 런던에 모여든 세계 각국의 난민들을 통해 지금 이 순간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과 폭력, 차별과 억압의 실상이 고발된다. 피델마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보스니아 제노사이드의 기억이 당대의 비극들과 결합되어 복합적인 울림을 자아낸다. “열두살짜리 소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폭탄을 맞은 사건. 피가 사방으로 번져 색이 누렇게 된 눈밭 위에 붉은 장미 꽃잎처럼 흩어졌어.” “그들이 청년 한 명에게 삼촌을 붙잡으라고 명령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꿇어앉아 삼촌의 고환을 물어뜯으라고 명령했어.”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당시 벌어진 일들은 소설 곳곳에서 출몰하며 작품의 기조를 이룬다. 학살 주범인 드라간은 물론 의외의 인물들이 사태의 직·간접 관련자임이 드러나면서 비극의 파장을 알려준다. 가령 마을 호텔 레스토랑의 주방 보조인 ‘벙어리 무조’를 보자. 평소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어느 날 음식 나르기를 거부한다. 17번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 드라간이 나쁜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남자들을 다 모아갔어요. 하루에도 수천 명씩. 그 사람이 TV에 나와서 그런 일은 없다고 했어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장황한 설명을 곁들이며 거부 이유를 밝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는 요령부득의 헛소리일 뿐이다. 삼촌의 고환이 언급된 위 인용문은 드라간이 체포되고 난 뒤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무조가 남긴 편지의 한 대목이다. “전쟁이 나기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우리를 심문했어요. 고문자들도 전쟁 전부터 알던 사람들이었고요. 어느 날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친구였을 때도 우리를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까.” 피델마가 런던의 난민 자선센터에서 만난 보스니아 출신 인물 나히르의 말이다. 그와 함께 붙잡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형은 고문과 살육의 기억을 잊지 말자고 하지만, 나히르는 증오와 복수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한다. “나는 강의 마술, 특히 봄에 얼음이 녹으면 산에서 급류가 내려오던 것이 기억난다고 대답했고, 형은 화가 나서 감정도 없다고, 그 일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나를 비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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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제노사이드를 다룬 소설 <작고 빨간 의자>를 쓴 아일랜드 작가 에드나 오브라이언. 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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