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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대가를 치르지 않는 마법은 없다

등록 2022-05-20 05:00수정 2022-05-20 10:39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박서련 지음 l 창비(2022)

박서련의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의 ‘작가의 말’에는 간략한 마법소녀물의 계보가 실렸다. 모든 소녀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초능력 영웅, 마법소녀의 계보가 있다. 작가보다 윗세대들에게는 마법소녀의 시작은 머리에 노란 꽃을 꽂은 <요술공주 밍키>일 것이다. “너와 나의 밍키, 밍키 밍키~”라는 주제곡이 유명했다. 내가 한때 열광했던 마법소녀물은 <천사소녀 새롬이>였다. 그전에 보았던 요술 공주들은 변신한 후에 범죄와 싸우고 사회의 공익을 달성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새롬이도 나름대로 임무가 있지만 내 눈에는 즐겁게 노래하고 스타가 되어 기쁨을 주는 일이 주 업무로 보였다. 나는 처음부터 슈퍼히어로가 될 그릇은 아니었다. 카드캡터 체리도 세일러문도 될 수 없다. 되기도 전에 은퇴했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의 도입부, 주인공인 ‘나’는 아직 마법의 힘을 각성 못 한 평범한 인간이다. 아니, 평범함을 넘어 좌절한 상황이다. 스물아홉에 변변한 경력도 없는 취업준비생, 카드 값 삼백만원에 좌절하여 화요일 새벽 세시 사십일분 마포대교 위에 섰다. 죽는다고 해도 알아차릴 사람 하나 없는 인생, 이런 나의 앞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난다. 아로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여자는 자신이 예언의 마법소녀이며, 내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도 사상최강, 시간의 최강소녀이다.

이 도입부를 읽은 독자들은 두 가지 의문을 떠올릴 것이다. 첫번째, 스물아홉살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나? 대답 하나. 누구든 소녀라고 마음먹은 이상은 언제든 소녀이다. 두번째, 내가 마법소녀라면 그 힘은 언제 각성할 수 있나? 대답 둘. 간절히 원할 때 할 수 있다. 나는 아로아의 말에 끌려 마법소녀의 길을 걷기로 하고, 전국 마법소녀 협동조합의 다양한 마법소녀들과 함께 기후 위기에 처한 지구의 위기를 돌려놓는 업무에 나선다.

이 짧은 소설은 전통적인 마법소녀 판타지의 클리셰를 한국 현실 안에서 구현했다. 이 소설 최고의 악당이자 이들이 찾던 극강의 마법소녀가 유튜브를 통해 초능력을 과시한다는 설정도 동시대적이다. 시계점 주인이었던 할아버지를 동경한 주인공이 자기 능력을 각성했을 때 얻어진 마구는 신용카드이다. 사실 현대 사회에 신용카드보다 더한 마법 도구가 어디 있을까. 어쨌든 원하는 것들을 눈앞에 대령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신용카드는 지금이 아니라도 결국에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우리의 마법소녀는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지구의 멸망을, 정확히는 지구는 몰라도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마법소녀들 포함, 우리 모두가 시차를 두고라도 값을 치러야 한다.

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른다는 말이 있지만 작은 일에도 대가는 따른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일찌감치 지구를 구하는 마법소녀는 은퇴해버렸지만, 이제는 인간이 망쳐가는 지구 속에서 나 자신을 구하려면 대가를 치르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도 박서련의 소설은 다정하다. 혼자서 갚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 모두 함께하자고 말해준다. 예측할 수 없는 기상이변과 사라진 꿀벌로 실감되는 위기 속, 우리는 주변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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