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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여성, 산업혁명기 영국을 종단하다

등록 2022-05-27 05:00수정 2022-05-27 10:22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남과 북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이미경 옮김 l 문학과지성사(2013)

마거릿 헤일은 신념의 변화로 목사직을 그만둔 아버지를 따라 ‘테니슨의 시에 나오는, 시 속 마을’ 같은 남부 핼스턴을 떠나 북부의 상공업 도시 밀턴으로 이주한다. 핼스턴이 푸른 하늘과 꽃이 만발한 들판의 공간이라면 밀턴은 공장 굴뚝이 뿜어내는 잿빛 연기와 면화공장 안을 떠돌며 노동자들의 폐 속으로 밀려드는 하얀 솜털, 기계가 토해내는 끊임없는 굉음의 공간이다. 마거릿은 아버지의 개인 교습 문하생인 면화공장 소유주 존 손턴을 만나는데, 손턴은 마거릿에게서 자신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받고 마거릿 역시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손턴에게 분노한다. 밀턴 사람들은 마거릿을 ‘곱게 자란’ 남부 출신 중류층 여성으로만 바라보지만, 사실 마거릿은 목사직을 내려놓은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지명수배자 신분으로 해외를 떠도는 오빠를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맡아 밀턴에서의 새 생활을 헤쳐나가는 용감하고 자주적인 여성이다.

마거릿은 밀턴의 파업 주동자인 노동자 히긴스와 어린 나이부터 면화공장에서 일하다가 면폐증에 걸려 죽어가는 히긴스의 딸 베시와 친구가 되면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북부 노동자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목격한다. 남부에서 목가적이고도 안락한 생활을 누려왔던 마거릿에게 참담한 북부의 현실은 고통을 아주 가까이서 목격해야 하는 충격과 고뇌를 안겨주지만, 마거릿은 현실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이웃들의 삶에 개입한다.

또한 마거릿은 결혼에 관해서도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보편적인 사고를 훌쩍 뛰어넘는 행보를 보여준다. 결혼을 신분제를 공고히 하고 재산을 기준으로 미래를 보장하는 방편으로 삼았던 당시 관습에도 불구하고 마거릿은 청혼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보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상대 남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남과 북>은 엘리자베스 개스켈이 찰스 디킨스가 발행하는 주간문예지 <하우스홀드 워즈>에 연재했던 사회소설이다. 개스켈은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빅토리아 시대 아동 노동 착취와 저임금 노동, 심각한 빈부 격차, 폐병의 형태로 두드러지는 산업재해, 신흥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갈등을 촘촘하게 묘사하며 당시 사회의 명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소설은 당대의 문제를 조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중심에 마거릿 헤일이라는 여성의 시선을 단단히 심어놓는다. 우리는 마거릿의 시선을 통해 산업혁명기 영국의 실상과 당시 노동자들의 척박한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투쟁과 연민과 우정을 목격한다. 또 계급 사이 갈등과 적대감을 드러낼 때조차 작가는 마거릿의 노력과 설득을 통해 노동자 히긴스와 공장주 손턴 사이에서 실낱같은 우정이 발생하는 모습을 잊지 않고 보여준다. 소설 전체에서 마거릿은 언제나 주장하고 설득하고 행동하고 연대한다. 흔히 남성의 모습으로 대표되는 산업혁명기 상공업지대 한가운데에 여성이 뛰어들어서 가장 적극적이고도 주체적으로 남과 북을 누비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큰 성취일 것이다.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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