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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우정의 힘으로 홀로서기

등록 2022-06-24 05:00수정 2022-06-24 10:31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이토록 긴 편지
마리아마 바 지음, 백선희 옮김 l 열린책들(2011)

세네갈의 1세대 엘리트 여성 라마툴라이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상을 치르는 중에 친구 아이사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편지를 보낸다. 라마툴라이와 아이사투는 똑같이 프랑스 학교에서 교육받고 교사가 되었으며 결혼 역시 조건보다는 사랑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결혼생활 25년 만에 남편은 라마툴라이와 열두명의 자식을 버리고 큰딸의 친구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라마툴라이는 일부다처제 때문에 남편과 일구어온 가정과 사랑을 송두리째 부정당하지만, 주변의 이혼 권유를 물리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친구 아이사투는 왕족 혈통의 시어머니가 세공장이의 딸인 며느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같은 혈통의 조카를 둘째 며느리로 맞이하자 일부다처제에 반기를 들고 이혼과 독립의 길을 선택한다. 이렇듯 소설은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어 독립 국가로서 걸음마를 시작한 아프리카 국가의 시민이자 근대 교육을 받은 1세대 여성들이 여전히 남성 중심의 이슬람 문화와 관습 아래서 어떤 갈등과 고통을 겪는지, 또 일부다처제의 폐습이 삶의 중요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라마툴라이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서간체 소설이지만 소설은 다양한 인물의 삶과 선택을 놀라울 만큼 복합적으로 그려낸다. 전통과 인습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다음 세대 여성의 억압에 일조하는 아이사투의 시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돈에 눈이 멀어 어린 딸을 아버지뻘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비느투의 어머니가 있다. 또 본부인만큼이나 일부다처제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는 둘째 부인 비느투와 나부가 있다. 교육받지 못하고 경제적 능력도 없어 부당한 현실 앞에서 그저 신경쇠약으로 무너지고 마는 자클린 같은 여성도 잠시 등장한다. 그러나 작가는 격변기 아프리카 여성의 고통과 불행만을 나열하지 않는다. 라마툴라이의 딸들처럼 서구의 유행을 추구하고 엄마 몰래 방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들키는 ‘신세대’ 여성들이 있다. 특히 큰딸 다바는 자유를 중시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현대 아프리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는 이혼을 망설이는 어머니에게 당당히 말한다. “결혼은 족쇄가 아니에요. 두 사람이 하나의 인생 계획을 공유하는 거지요. 그리고 부부가 이 결합에서 각자 제 몫을 얻지 못한다면 그걸 유지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여자도 결별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어요.”

마리아마 바는 이 작품으로 아프리카 여성의 현실을 과감하고도 세밀하게 그려낸 최초의 여성 작가로 인정받아 1980년 아프리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노마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자신의 처지와 가장 비슷한 50대 엘리트 여성을 중심에 놓고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의 시선까지 고루 담아내고자 노력한다. 특히 편지의 형식을 취해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이 홀로서기를 감행할 때 여성연대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우정에는 사랑이 결코 알지 못하는 위대함이 있어. 사랑은 제약을 만나면 말살되는데 우정은 어려움 속에서 돈독해지지.”

이주혜/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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